[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우리말다운 '민법 조문'을 보고 싶다

2022. 12. 5.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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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이란 어법에 맞지 않아 틀린 문장이다.
우리 민법에는 이런 오류가 200개도 넘는다고 한다.
민법이 1958년 제정 공포됐으니 60년 넘게 방치돼온 셈이다.

가)사단법인은 사람이 없게 되거나 총회의 결의로도 해산한다.(민법 제77조 ②항)

나)채권은 10년간 행사하지 아니하면 소멸시효가 완성한다.(민법 제162조 ①항)

민법 조문을 그대로 옮긴 것인데, 얼핏 보기에도 비문(非文)임이 드러난다. 비문이란 어법에 맞지 않아 틀린 문장이다. 우리 민법에는 이런 오류가 200개도 넘는다고 한다. 민법이 1958년 제정 공포됐으니 60년 넘게 방치돼온 셈이다. 민법은 대한민국 법률 가운데 가장 조항 수가 많다. 1118조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특히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규율하는 법이라, 법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법률이다. 국립국어원 공공언어지원단장을 지낸 김세중 박사가 민법 개정 운동에 나선 까닭이기도 하다.

 민법 제정 64년…비문만 200군데 넘어

올 한 해 우리말과 관련해 조용히 활동하면서도 가장 큰 울림을 준 학자로 그를 꼽을 만하다. 처음에는 신문 사설을 대상으로 했다. 그러다 우리 생활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게 법조문이라는 생각에 본격적으로 민법의 오류 분석에 매달렸다. 그 결과를 모아 <민법의 비문>이란 책을 펴냈다. 나아가 SNS 활동 등을 통해 꾸준히 법조문 속 문법 오류를 알리고 개선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그의 지적을 듣다 보면 민법 비문의 유형이 어쩌면 그리도 일반 글쓰기에서의 오류와 똑같은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예문 가)는 이른바 ‘등위접속 오류’의 대표적 사례에 해당한다. ‘-과(와), -나, -며, -고, -거나’ 등이 국어의 등위접속어다. 이들은 문장 안에서 앞뒤에 오는 말을 대등하게 연결해주는 문법요소다. 이때 ‘대등하게’에 주목해야 한다. 접속어를 사이에 두고 명사면 명사, 동사면 동사가 오고 구는 구끼리, 절은 절끼리 어울려야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수출과 수입이~’ ‘늘어나거나 줄어들고~’와 같이 앞뒤를 같은 값으로 연결해야 한다. 간단한 원칙이지만 실제 글쓰기에서는 이를 잘 지키지 않아 왕왕 비문이 생긴다.

가)는 요약하면 ‘A는 B거나 C로도 해산한다’ 문장이다. 이때 B와 C에 같은 값의 말이 와야 한다. 예문에선 ‘(사람이 없게 되다)+(총회의 결의)’, 즉 ‘절+명사구’로 이어져 글의 흐름이 어색해졌다. 앞뒤를 똑같이 ‘절’ 형태로 연결해야 자연스럽다. <‘…사람이 없게 되’거나 ‘총회에서 해산을 결의한’ 경우에도 해산한다.>

 곳곳에 일본어 오역…우리말답게 개정을

예문 나)에도 글쓰기에서 자주 나오는 ‘동사용법 오류’가 담겨 있다. ‘완성하다’는 타동사다. 목적어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예문에서는 이를 ‘…소멸시효가 완성한다’로, 마치 자동사처럼 썼기 때문에 문장이 엉성해졌다. 타동사를 목적어 없이 쓰려면 피동, 즉 ‘완성된다’로 해야 할 자리다. 민법에는 이런 오류가 162, 163, 164조를 비롯해 곳곳에 널려 있다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일반적인 글쓰기에서도 이런 오류는 부지기수로 일어난다. “일자리 회복세가 지속하고 있다” 같은 문장도 흔히 접하는 비문이다. ‘지속하다’는 타동사로, ‘~을 지속하다’가 바른 용법이다. ‘회복세’를 주어로 쓰려면 ‘~가 지속되다’처럼 피동형으로 써야 한다.

“안동시의 조치는 주민 편익과 지역경제를 우선한 용기 있는 결정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여기서는 반대로 자동사를 타동사처럼 썼다. ‘우선하다’와 ‘우선시하다’는 전혀 다른 말이다. ‘우선하다’는 자동사다. “능력과 실력이 우선하는 사회”처럼 쓴다. 이를 타동사로 쓰려면 ‘우선시하다’라고 한다. “그는 학벌보다 능력을 우선시한다.”

'저널리즘 글쓰기 10원칙' 저자·前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어법을 벗어나면 글이 어색해지고 이는 곧 세련되지 못한, 격이 떨어지는 표현이 된다. 광복 77년, 민법 제정 64년이 지났는데 우리 민법에는 여전히 일본어 오역이 곳곳에 남아 있다.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 국민은 바른 민법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그의 외침에 21대 국회가 응답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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