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레카] 백지, 텅 빈 기표의 뜨거운 함성 / 안영춘

[유레카]

백지 시위. 김재욱 화백

‘백지’의 가장 보편적 메타포는 뭘까. ‘백지 한장도 맞들면 낫다’ ‘백지 한장 차이’처럼 무게나 두께에 관한 비유는 더러 있지만, 의외로 색깔에 관한 비유는 보기 어렵다. 종이는 본디 흰색이고 주요 쓸모가 표기에 있다고 간주하면, 백지의 보편적 속성 역시 아무것도 쓰이거나 그려져 있지 않은 ‘텅 비어 있음’(공백)일 터이다.

영영사전에서도 ‘white paper’를 ‘백서’와 함께 ‘빈 종이’(blank paper)라고 풀이하는 걸 보면, 흰 종이에서 공백을 읽어내는 건 인류 공통의 감각인가 보다. 정부 공식 보고서를 뜻하는 백서의 유례가 영국 정부 보고서(의회 보고서는 ‘청서’)의 표지 색 관행이라는 점에서 색깔에 관한 드문 용례이나, 추상성이라고 할 만한 게 없는 납작한 비유에 불과하다.

텅 빈 상태로서의 백지는 다양한 용례만큼이나 맥락과 뉘앙스도 여러 갈래다. 어린이더러 ‘백지 같다’고 할 땐 순수함이나 무한한 가능성을 암시한다. 반면, 어른을 백지에 빗대면 물색없다는 빈정거림이거나, 심지어 지적 장애를 낮잡는 것일 수 있다. 백지수표나 백지위임장은 손에 쥔 자의 욕망만큼 채워짐이 예비된 공백이고, 공직자에게 백지신탁이란 재산권 행사의 한시적 공백이다.

백지의 메타포는 정치적 의사 표현과도 만난다. 1988년 7월 노태우 대통령이 정기승 전 대법관에 대한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하자 평민당과 민주당 의원 131명 전원과 일부 여당 의원까지 백지투표를 해 동의안을 부결시켰다. 1998년 3월엔 김대중 대통령이 김종필 국무총리 임명동의안을 제출하자 한나라당 의원들이 백지투표를 했다. 두번 모두 격렬한 논란을 일으켰다.

백지투표를 국회의원만 하는 건 아니다. 유권자의 정치적 불복종 행위로 나타날 때도 있다. 지난해 12월 홍콩에서는 그해 3월 바뀐 선거법에 따라 처음 치러지는 입법회 선거를 앞두고 백지투표 캠페인이 벌어졌다. 공안당국은 캠페인에 참여한 시민들을 선거법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했고, 법원은 망명 정치인에게도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중국 본토에서 코로나19 봉쇄에 항의하는 백지시위가 잇따르고 있다. 한국에 거주하는 중국인들도 거리에서 백지 손팻말을 들었다. 저 흰 종이가 두려운 자가 있다면 그건 침묵의 포즈 속에 담긴 격정이 얼마나 뜨거운지 쉬이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안영춘 논설위원 jon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