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 평등 ‘미국의 에덴’ 꿈꿨지만… 흑인 차별 살벌했던 ‘가짜천국’[지식카페]

입력 2022. 12. 5. 09:06 수정 2022. 12. 22.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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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된 소설 ‘헬프’의 배경인 미시시피주 주도 잭슨의 모습. 게티이미지뱅크
허클베리 핀이 흑인 노예 짐과 함께 뗏목을 타고 여행했던 미시시피강 주변의 초원지대. 게티이미지뱅크

■ 지식카페 - 장은수의 도시와 문학 - (21) ‘인종분리 아지트’잭슨

미시시피강 주변 비옥한 대지 등 미국夢 실현할 최적 장소 여겨… 플랜테이션 대농장 통한 노예 노동 판쳐

남북전쟁 뒤에도 비인간적 취급 여전… 학교·도서관·버스·식당 등서도 철저하게 흑백 분리‘악명’

“아침마다, 죽어서 땅에 묻힐 때까지 자기 자신에게 물어봐야 해요. 저 바보들이 오늘 내게 지껄인 말을 믿을 것인가?” ‘헬프’에서 캐스린 스토킷은 말한다. ‘저 바보들’은 다른 이에게 상처 주는 자들을 가리킨다. 고용주 딸인 백인 소녀 유지니아가 못생겼다고 놀림당해 훌쩍이자 흑인 가정부 콘스탄틴은 진짜 못난이는 가슴에 산다면서 그녀를 위로한다. 저 바보들이 차별을 일삼는 백인들을 가리키는 건 물론이다.

배경은 1963년 미시시피주 주도인 잭슨, 흑백 인종 분리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다. ‘남부의 심장’인 미시시피주는 노예제의 추억에 젖어 인종차별이 횡행하던 곳이다. 잭슨은 남북전쟁 당시 분리 독립을 추진했던 ‘디프사우스(deep south)’ 지역 한복판에 자리 잡은 인종 분리의 아지트다.

화자 유지니아는 모기를 닮았다는 이유로 스키터란 별명으로 불린다. 친구 힐리 홀브룩은 병이 옮을까 봐 흑인과 화장실을 같이 쓸 수 없다면서 ‘가정부 위생법’을 발의해 모든 가정에 백인 전용 화장실을 두려고 한다. 분개한 스키터는 아이빌린, 미니 등 흑인 가정부들을 설득해 그녀들의 생활을 세상에 알리려 한다.

사실이 새나가면 해고는 당연하고, 린치로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 흑인 여성 13명이 용기를 발휘한다. 비참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다. 고백은 끔찍하기 그지없다. 아이벌린의 아들 트리로어는 사고를 당했으나 흑인이었기에 병원도 이용하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는다. 흑인들은 백인 화장실을 썼다고 두들겨 맞아 시력을 잃기도 하고, 쿠클럭스클랜(KKK) 이야기를 했다고 혀를 뽑히기도 한다.

‘헬프’는 5년 동안 무려 60번이나 거절당했으나, 출판되자마자 뉴욕타임스 109주 연속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등 큰 주목을 받았다. 1964년 인종 분리를 금지하는 시민권 법안이 나오고 나서도 좀처럼 해소되지 않은 인종차별이 이 작품을 여론의 중심으로 이끈 것이다.

잭슨을 포함한 미시시피 지역은 본래 아메리카 원주민 촉토인의 땅이었다. 1820년 미국 연방 정부는 촉토 연맹과 (강제) 조약을 맺어 그 땅을 빼앗았다. 백인들은 촉토인 거주지를 허물고 울타리를 불태웠으며, 그들을 학살했다. 1821년 촉토인이 초토화된 펄강 유역에 도시가 건설되고 전쟁 영웅 앤드루 잭슨의 이름을 따서 잭슨으로 명명됐다.

잭슨이 속한 남부의 초원지대는 ‘미국의 에덴’이었다. 토머스 제퍼슨은 스스로 땀 흘려 자신의 밭을 일구는 자작농을 민주주의의 근간이요, 미국몽을 현실로 만들 낙원의 창조자로 보았다. 비옥한 대지와 풍부한 물, 우거진 삼림과 온화한 기후를 바탕으로 ‘즐거운 나의 집’을 짓고 경건히 살아가는 청교도적 이상의 실현자였다.

마크 트웨인은 미시시피강 유역의 대자연을 산업 문명에 물들지 않은 자유의 대지로 상상한다. 허클베리 핀은 미국의 유년기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는 흑인 노예 짐과 함께 뗏목을 타고 미시시피강을 여행하면서 자유를 만끽한다. “뗏목만 한 집은 어디에도 없을 거야. 다른 곳에서라면 갑갑해서 숨 막힐 듯하지만, 뗏목에선 안 그러거든. 뗏목을 타고 있으면, 자유롭게 마련이지.”

그러나 순수하고 자유로운 남부란 달콤한 기만에 불과했다. 해방된 인간은 백인뿐이었다. 자유와 평등은 남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있는 것은 인종주의뿐이었다. 미국의 에덴은 백인과 흑인, 주인과 노예의 기만적 이중구조 위에 이룩한 가짜 천국이었다.

‘얼간이 윌슨’에서 트웨인은 흑인 피가 32분의 1만큼 섞인 아들을 주인집 아들과 맞바꾸는 ‘하얀 흑인’ 여성 록시를 등장시킨다. 아무도 모를 만큼 닮았으나 상대 인종으로 성장하는 두 아이는 인종이란 생물학적이기보다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것임을 분명히 알려준다.

미국의 꿈은 전혀 순백하지 않았다. 오욕을 견디며 살아남은 흑인들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 백인들의 죄의식을 자극했다. 야생의 자연에서 펼쳐지는 자유는 백인의 부와 권력을 위한 완벽한 사기였다. 소박한 사람들이 성실히 일해서 안분지족 살아가는 자작농은 사실상 없었고, 노예 노동으로 유지되는 플랜테이션 대농장만 위력을 떨쳤다. 미국몽의 실체는 악몽이었다.

“난 지옥으로 가겠어.” 흑인 노예인 짐을 고발하는 대신 침묵을 선택하며 허클베리는 다짐한다. 이로써 트웨인은 노예제를 지탱하는 비인간적 도덕(도망 노예를 신고하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을 송두리째 파괴한다. 결과는 남부의 반발과 전쟁이었다.

1861년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미시시피, 조지아, 루이지애나, 텍사스 등이 미연방을 탈퇴했고, 남부 쿠데타 세력을 진압하기 위한 내전이 일어났다. 남북전쟁은 네 해 동안 이어졌다. 남군의 전략 물자 공급지였던 잭슨은 불타올라 철저하게 파괴됐다. 1863년 노예해방선언이 발표되고, 1865년 미국 수정헌법에 “어떤 노예제도도 미국이 지배하는 영토에 존재할 수 없다”고 명시됨으로써 노예제는 공식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약자에겐 늘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1880년대까지도 백인 농장주의 채찍, KKK단의 린치, 경찰력을 동원한 공적 협박 속에서 강제 노역하는 노예가 400만 명 이상이었다. 산업화 부진에 따른 상대 빈곤, 전쟁 패배에 따른 트라우마는 남부에 우울한 어둠을 드리웠고, 재건 과정에서 흑인 시민권은 “분리는 하지만 평등하다”는 짐 크로의 궤변적 구호와 함께 합법적으로 박탈당했다. 검은 저주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 백인이라는 위생학적 인종 차별을 실현하기 위해서 짐 크로는 학교, 도서관, 대중교통, 식당, 거주지 등 곳곳에 장벽을 세운 후 흑인과 백인의 이용을 분리함으로써 사회적 폭력을 통해 흑백 차별을 유지하는 새로운 노예제를 실행했다.

윌리엄 포크너와 유도라 웰티는 남부의 물질적·정신적 유산을 물려받고, 이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생기는 인물들의 내적 투쟁을 섬세한 언어로 그린다. 웰티는 ‘낙천주의자의 딸’에서 청교도적 가부장제가 지배하는 좁은 공동체에서 안온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과 거기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여성 예술가의 갈망을 보여준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소리와 분노’ ‘팔월의 빛’ 등 무수한 이야기로 이루어진 ‘포크너 월드’는 가상의 요크나파토파 마을과 제퍼슨시를 배경으로, 짐 크로 시절의 사회적 격변에 따른 남부 사람들의 정신적·심리적 변화를 보여준다.

1833년 요크나파토파에 나타난 토머스 서트펜 집안의 이야기를 그린 ‘압살롬, 압살롬!’은 인종차별이 어떻게 한 집안을 파멸로 몰아넣는지를 보여준다. 토머스는 노예를 거느리고 목화 농장을 해서 부를 쌓은 ‘악귀’ 같은 남자다. 자수성가한 그는 지역 명문가의 딸 엘런 콜드필드와 결혼해 헨리와 주디 두 자매를 낳는다. ‘미국몽’을 구현한 것이다. 그러나 헨리의 친구 찰스 본과 딸 주디의 결혼을 반대하면서 베일에 싸인 토머스의 과거가 드러나고, 가문은 몰락한다. 나중에 헨리의 손에 살해되는 찰스는 흑인 피가 약간 섞였다는 이유로 그가 버린 아들이었다.

‘소리와 분노’는 제퍼슨의 대지주 콤슨 집안의 몰락을 통해 대공황 전후 남부인들의 좌절과 분노를 의식의 흐름 기법을 이용해서 보여주고, ‘읍내’는 가난한 노동자로 북부에서 들어와 성공한 플렘 스놉스 집안의 이야기를 통해서 북부 경제의 남부 침탈 모습을 상징적으로 재현한다.

순혈성에 대한 백인들의 집착은 후기의 ‘팔월의 빛’에 이르기까지 반복해서 나타난다. 그러나 이는 승리의 증표가 아니라 고된 노력 끝에 미국몽을 실현한 이들을 파멸로 몰아넣는 원인이 된다. “우리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명예도 긍지도 없고…….” 인종주의에 대한 포크너의 진단이다.

오늘날 잭슨은 가부장제 인종주의에서 얼마나 벗어났을까. 존 그리샴은 데뷔작 ‘타임 투 킬’(1988)에서 한 흑인 남성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는 딸을 폭행하고 강간한 백인 불량배 둘을 총으로 죽인 죄로 재판에 올랐다. 백인이라면 배심원 무죄 평결이 나올 일이나, 흑인이기에 사형 위기에 몰려 있다. 변호사 워맥은 배심원단에게 눈을 감고 상대방 인종의 처지에서 생각하라고 호소해 기적을 일으킨다. 임무는 무겁고 길은 멀다. 그러나 세상은 저 바보들의 눈이 아니라 약자들의 눈으로 살필 때마다 자유와 평등을 향해서 앞으로 나아간다. 노예제의 땅인 남부의 요충지 잭슨은 우리에게 이 사실을 알려준다. 문학평론가

■ 용어설명

디프사우스(deep south)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앨라배마, 조지아, 사우스캐롤라이나 등 미국 남부의 면화 농장 지대를 가리킨다. 때때로 텍사스, 플로리다 등도 포함된다. 노예가 가장 많았던 이 주들은 남군의 핵심 지역이었으며, 전쟁 이후 오랫동안 경제적 빈곤에 시달렸다. 1948년까지 백인만 투표할 수 있을 정도로 인종차별이 극심했고, 인종 분리에 반대하는 민권운동의 온상이 되었다.

쿠클럭스클랜(KKK)

기독교 근본주의에 바탕을 둔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비밀결사단체로, 인종차별, 반유대주의, 동성애 반대 등을 주장한다. 1865년 남군 패잔병 장교 6명이 유색인종의 정치적 진출 반대와 흑백 분리 정책 실행을 목적으로 결성했다. 흰 천으로 온몸을 가리고, 흑인 인권운동가나 이를 지지하는 백인들에게 테러와 린치를 자행하는 등 살인마저 서슴지 않는 극악한 패륜 집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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