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체인저 한국과 일본, 16강 판도 흔들까

배진경 입력 2022. 12. 5. 07:20 수정 2022. 12. 5.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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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의 안과 밖] 축구 권력은 유럽과 남미가 나눠 쥐고 있었다. 카타르월드컵에서 양강 체제에 균열이 생겼다. 한 걸음씩 전진해온 아시아 앞에서 축구 열강은 각성의 시간에 직면했다.
11월22일(현지 시각) 사우디아라비아가 아르헨티나를 격파하며 카타르월드컵 이변의 주인공이 됐다. ⓒAP Photo

오랜 시간 축구의 권력은 유럽과 남미 양강 체제였다. 축구 철학에서 비롯된 스타일부터 기술과 전술, 심지어 관중석의 응원 문화까지 두 대륙의 영향이 미치지 않은 영역이 없다. 권력 싸움의 정점은 월드컵이었다. 우승 트로피는 언제나 남미 아니면 유럽 팀 차지였다. 그런데 카타르월드컵에서 이 양강 구도에 균열을 내는 시도가 이어졌다. ‘신스틸러’로 등장한 아시아 팀들 때문이다.

첫 주자는 사우디아라비아였다. 11월22일, 사우디는 카타르 루사일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C조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대이변을 일으켰다. 상대는 우승 후보 중 한 팀인 아르헨티나였다. 전반 10분 만에 ‘축구의 신’ 리오넬 메시가 페널티킥으로 선제골에 성공했을 때만 해도 뻔한 흐름이었다. 그러나 사우디는 우리가 알던 패착을 반복하는 팀이 아니었다. 실점에 당황한 것도 잠시. 최종 수비라인을 끌어올려 미드필드 라인과 콤팩트한 대형을 유지하면서 중원 장악에 이은 역습을 시도했다. 위험을 감수한 대형이었다. 상대에게 배후 침투 공간을 내줄 수도 있었다. 놀랍게도 작전은 맞아떨어졌다. 사우디의 일자 수비 대형은 오프사이드 트랩을 효과적으로 구사하며 아르헨티나의 공격을 무력화했다. 아르헨티나가 범한 오프사이드 횟수가 자그마치 10개에 달했다. 골라인을 넘어선 필드골 3개는 무효 처리됐다. 아르헨티나를 옥죈 사우디는 후반 3분 동점골에 이어 5분 만에 한 골을 더 추가하며 2-1 역전승을 거뒀다. 고개 숙인 메시의 얼굴에는 절망이 가득했다.

다음 날 일본이 배턴을 이어받았다. ‘죽음의 조’라 불리던 E조에서 가장 먼저 첫 승을 신고했다. 상대는 월드컵 결승 최다(8회) 진출국이자 우승 4회의 역사를 자랑하는 독일이었다. 아르헨티나와 마찬가지로 독일이 먼저 골을 넣었다. 이후 경기를 대하는 양팀의 자세는 판이했다. 첫 골로 리드를 잡은 독일이 여유를 부리며 느슨해졌을 때, 일본은 백포(back 4)에서 백스리(back 3)로 시스템을 정비했다. 수비를 강화하는 동시에 공격 시 전환 플레이의 속도를 높일 수 있는 대형이었다. 신체 조건과 체력, 주력 등 피지컬에서 월등한 우위를 점한 팀은 독일이었지만 한 발짝 더 뛰며 상대를 압박한 팀은 일본이었다. 70분을 버틴 일본의 집념은 보상으로 돌아왔다. 도안 리쓰와 아사노 다쿠마의 연속골에 힘입어 독일을 2-1로 눌렀다. 2018년 월드컵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한국에 0-2로 충격패한 독일은 2022 월드컵 첫 경기에서 일본에 또 덜미가 잡혔다.

그리고 대한민국 차례였다. 11월24일 우루과이와 H조 조별리그 첫 경기에 나선 한국은 2002년 이후 가장 뚜렷한 색채를 가진 팀플레이를 선보였다. 4년 반 동안 다져온 파울루 벤투의 ‘빌드업’ 축구가 세계무대에서도 통했다. 상대를 터치라인까지 몰아붙이는 전방 압박, 왕성한 활동량과 종횡을 고루 활용하는 패스 루트로 점유율과 주도권을 챙겼다. 속도감 있는 전환 플레이로 공격과 수비에서 모두 수적 우위를 유지했다. 운동능력이 현격히 떨어진 수아레스는 말할 것도 없고 누녜스, 발베르데의 침투와 파괴력을 통제했다. 양 팀 모두 득점 없이 무승부로 마무리했지만, “상대가 누구든 우리 축구를 하겠다”던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경기였다.

‘승점 제물’에서 ‘게임 체인저’로

2차전에서도 아시아 팀의 반란이 이어졌다. 아시아 맹주를 자처하던 이란은 잉글랜드와 1차전에서 2-6으로 참패한 충격을 딛고 웨일스에 2-0으로 승리했다. 이란 특유의 끈끈한 두 줄 수비와 역습으로 추가시간에만 두 골을 몰아넣었다. 오스트레일리아(호주)도 저력을 발휘했다. 1차전에서 ‘디펜딩 챔피언’ 프랑스에 1-4로 무너졌지만 튀니지를 잡고 반등에 성공했다.

아시아 팀의 성과는 그저 1승을 올렸다거나 승점을 확보했다는 자기 위안으로 그치지 않는다. 약팀이 강팀을 상대하는 방식이 달라졌다. 모험을 감수한 사우디와 일본, 도전적 ‘마이웨이’를 실행한 한국, 피지컬과 수비 조직력의 강점을 살린 이란과 호주까지 저마다 진일보한 경쟁력을 입증했다. 각자의 방식으로 상대를 극한으로 몰았다. 그동안 월드컵에서 아시아 팀의 지위는 타 대륙 공공의 승점 제물 정도였다. 이번에는 각각 조별리그 판도를 흔드는 ‘게임 체인저’로 존재감이 뚜렷했다. 아르헨티나와 독일이 조별리그 최종전까지 16강행에 마음을 졸여야 했던 것은 첫 경기 패배의 부담을 떨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H조는 한국의 분전으로 최종전까지 물고 물리는 ‘경우의 수’를 셈해야 했다. 이란의 각성에 잉글랜드와 미국, 웨일스 모두 마지막 경기까지 총력을 기울여야 했다(그리고 글을 쓰고 있는 시점을 기준으로, 호주는 기어이 덴마크를 끌어내리고 16강행에 성공했다).

아시아 축구의 경쟁력은 인적 교류를 통한 결실이라 볼 수 있다. 과거 아시아 축구의 성장이 유럽이나 남미 출신 지도자의 축구 철학이나 전술을 이식하는 데서 이뤄졌다면, 이제는 실제로 축구의 본류를 경험하고 적응력을 키우는 선수들이 많아진 것으로 변화했다. 유럽에서 뛰는 아시아 선수들이 많아졌다. 유럽 팀 소속으로 벤치만 달구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팀의 주축으로 활약하는 선수들이 대부분이다. 독일을 잡은 일본 대표팀의 선수 7명이 분데스리가(독일)에서 뛰고 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도 더 이상 상대 이름값만으로 위축되거나 물러서지 않는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아이콘 손흥민은 말할 것도 없고 김민재, 황인범, 이재성, 이강인 등도 유럽 각 리그에서 이미 검증된 선수들이다. 어떤 팀을 상대해도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이전 세대의 목소리는 “월드컵에서 우리가 가진 것을 채 보여주지도 못하고 돌아오는 게 아쉬웠다”가 주를 이뤘다. 지금 세대는 “우리가 강한 팀이라는 것을 보여주자”(손흥민, 축구협회 인사이드 캠)라는 마인드셋으로 경기장에 나선다. 우루과이전에 교체 출전한 이강인의 소감은 새로운 세대가 월드컵이라는 긴장을 대하는 방식을 대변한다. “너무 재밌었다. 경기 때 최고로 행복했다. 떨리기보다는 설렜다.”

조별리그 H조 3차전 대한민국과 포르투갈 경기. 손흥민 선수가 황희찬 선수에게 킬패스를 하는 순간. 이날 한국은 포르투칼에 2-1 역전승을 거둬 극적으로 16강에 진출했다. ⓒ연합뉴스

반자동 오프사이드 판독 기술(SAOT)도 최소한의 공정성 확보에 도움이 된 장치였다. 주심의 육안으로 확인하지 못하는 미세한 차이를 SAOT는 잡아냈다. 사우디가 아르헨티나전에서 판정에 대한 시비로 시간을 끌지 않고 경기에 다시 집중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16강이라는 가시적 결실을 맺은 팀과 그렇지 못한 팀, 조별리그에서의 운명은 어떤 식으로든 갈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시아라는 이름으로 각기 다른 유니폼들이 보여준 가능성은 축구에서의 경계를 그 어느 때보다 크고 넓게 확장했다. 2022 카타르월드컵에서 발견한 희망이다.

아시아가 상대를 분석하고 대응법을 고민하는 동안 여유를 부린 축구 열강들은 각성의 시간에 직면했다. 월드컵에서 누려온 기득권이 당연하게 유지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월드컵의 시계는 계속 흘러가고, 아시아는 한 걸음씩 전진하고 있다.

배진경 (전 ⟨포포투⟩ 편집장)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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