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백인 아니면 왜 책 주인공 안되지?’ 의문”

최원형 2022. 12. 5. 07:0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어린이문학 100년 ‘쓸모’를 찾아서][어린이문학 100년 ‘쓸모’를 찾아서]
◆2편: 차별 너머 다양성
[인터뷰] 뉴베리상 받았던 한국계 작가 린다 수 박
린다 수 박 제공.

한국계 미국인 작가 린다 수 박(62)은 2002년 <사금파리 한 조각>으로 뉴베리 메달을 받았다. 동아시아계로선 최초, 아시아계로선 1928년 인도계인 단 고팔 무커지(<비둘기 전사 게이넥>)에 이은 두번째 수상이었다. 전근대 한국의 역사와 문화로부터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해온 박은, ‘우리에겐 다양한 책들이 필요해’(We Need Diverse Books) 운동에 참여하는 등 지난 20여년간 미국 어린이청소년 문학이 지금처럼 ‘다양성’을 중시하는 흐름으로 나아가도록 길을 닦아온 대표적인 작가다.

최근 <한겨레>와 한 서면 인터뷰에서 박은 “미국 출판사 ‘하퍼콜린스’와 계약해, 새로운 출판 임프린트 ‘알리다 북스’(Allida Books)를 설립하고 제작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한국어 ‘알리다’에서 따온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출판사는 “‘배제된 공동체들’(marginalized communities)의 창작자들을 발굴해 그들의 책을 펴낼 계획”이다. ‘배제된 공동체’란 인종, 부, 젠더 등 다양한 요인으로 이른바 ‘주류’ 문화에서 밀려난 모든 공동체들을 말한다. 알리다 북스는 내년 봄에 박 자신을 포함한 아시아 작가 12명이 함께 집필한 첫 책 을 펴낼 계획이다.

박은 2년 전부터 한국계 미국인·한국인 디아스포라 작가들의 어린이 책을 소개하는 웹사이트 ‘키부카닷컴’(kibooka.com)을 운영하고 있다. 박이 작가로서 경력을 시작하던 1990년대 말 “미국 출판사에서 책을 내는 한국인 작가는 한줌에 불과했다.” 요즘 키부카닷컴의 목록에는 “70명도 더 되는 작가·일러스트레이터들이 있고, 매주 새로운 이름들이 올라온다.” 이에 대해 박은 “현재 미국 어린이 책 산업은 ‘재현·대표’(representation)의 측면에서 ‘토큰주의’(tokenism·소수 집단을 구색 맞추기로 끼워 넣는 것)를 넘어서고 있다”고 평가했다.

린다 수 박 주도로 2023년 초 정식 출범할 출판사 ‘알리다 북스’의 로고.
린다 수 박 제공.

이런 측면에서 박이 2020년 펴낸 <초원의 연꽃>은 여러모로 상징적이다. 19세기 미국의 서부 대자연 속 가족 이야기를 담은 <초원의 집>은 로라 잉걸스 와일더의 자전적 소설로, 오랫동안 미국 ‘주류’ 어린이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2010년대에 들어 작품 속 흑인·원주민에 대한 서술이 인종차별적이라는 지적이 나왔고, 작가의 이름을 딴 상을 제정(1954년)했던 미국어린이도서관협회(ALSC)는 2018년 상에서 작가 이름을 빼기로 결정(관련 기사)했다.

미국 어린이로서 박 역시 어린 시절 <초원의 집>을 읽으며 완벽한 미국인이 되길 꿈꿨으나, 백인 아이들이 영웅으로 등장하는 ‘주류’ 책들을 읽으며 “다른 종류의 아이들이 주인공인 책은 왜 안 돼?”라고 자문하게 됐다고 말한다. <초원의 연꽃>은 <초원의 집>과 같은 시대와 공간을 배경으로 하지만, 중국계 미국인 소녀가 차별과 혐오에 도전하는 이야기다.

박은 “역사에 대한 좁은 인식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는 문제들과 직결된다”고 짚었다. 예컨대 산업혁명을 단지 ‘진보의 시기’라고만 배운 세대는 산업혁명이 환경에 끼친 부정적 영향을 알지 못한다. 백인에 대한 이야기만이 가치 있다는 인식도 마찬가지다. “한때 존엄과 존경을 부정당했던 사람들의 인격을 포함할 정도로 우리의 인식이 커지면, 우리의 말과 기호, 행동 역시 그런 성장을 반영할 필요가 있어요. 다른 관점으로 쓰여진 더 많은 이야기들이 필요합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다음주 3회 ‘낙관 너머 현실 ’이 나올 예정입니다.

※본 기사는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 린다 수 박 작가 인터뷰 전문

―작가님은 한국 역사와 문화에 대한 것들을 다루는 작품을 주로 써왔습니다. 무엇이 작가님을 작가로 만들었는지, 어떤 것을 작품의 주된 모티브로 삼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나는 어렸을 때 게걸스러운 독자였어요. 부모님은 한 달에 두 번씩 빠짐없이 나를 공공도서관에 데려가 책에 대한 나의 사랑을 키워 주셨습니다. 훌륭한 공공도서관을 유지하고 지지하는 공동체에서 자란 것은 나에게 행운이었죠. 단 1페니도 쓰지 않고도 그렇게 많은 책들을 읽고 싶은 대로 읽을 수 있었으니. 책은 아이였던 내게 너무나 중요했고,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만들어줬어요. 지금 내가 하려 하는 일은 바로 오늘날 아이들이 똑같이 중요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쓰려는 것입니다.”

―작가님은 뉴베리 메달의 첫 동아시아계 수상자입니다. 수상했을 당시인 2002년 미국 사회의 분위기는 어땠으며, 수상 이후 접한 반응은 어땠습니까?

“수십 년 동안 미국 사회는 아시안계 사람들을 ‘모범 소수자’(model minority·백인 중심 질서에 순응하는 소수자를 가리킴)로 바라봤습니다. 우리 가족을 포함해 많은 아시안 가족들이 자신들이 그러고 있다는 별다른 의식 없이도 그런 역할을 받아들였고요. 아시안 사람들이 ‘주류 문화’가 정의해주는 대로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정의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건 매우 느린 과정이었으며, 지금도 이어지고 있어요.
수상 뒤 내가 어떤 측면에서든 ‘아시안계 미국인’을 대표하길 기대받고 있다고 느꼈는데, 그것은 매우 불편한 일이었어요. 내가 자주 받는 질문들은 내 특정한 삶의 경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아시아인'이 의미하는 것에 대한 기존 관념에 안주하기를 원하는 백인들을 위해 일반화된 것이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한국인들과 한국계 미국인들로부터 축하의 메시지를 많이 받았는데, 그것은 무척 감동적이었요. 이 상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닐지 미처 깨닫지 못했거든요. 대부분 낯선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한국계 미국인이 한국을 소재로 쓴 책이 그렇게 권위 있는 상을 받았다는 사실에 기뻐해 주었습니다.”

―지난해(2021년)에는 한국계 작가 태 켈러가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으로 뉴베리 메달을 받았고, 올해에는 중국계 작가 안드레아 왕이 <물냉이>로 뉴베리 아너를 받았습니다. 뉴베리상 100년이 되는 올해에는 <마지막 이야기 전달자>가 뉴베리 메달을 받았는데, 여기엔 라틴 문화가 짙게 반영되어 있죠. 미국 어린이 문학의 전반적인 흐름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특히 지난 20여년 동안 당신이 작가로 활동하면서, 어떤 변화를 느껴왔는지?

“오늘날 어린이책 산업에서 아시안은 한 ‘덩어리’가 아니라는 인식, 어떤 문화도 한 덩어리가 아니라는 인식이 더 커지고 있어요. 또한 역사적 기록을 잘못 표현하거나 부정확하게 묘사함으로써 벌어지는 위험성에 대한 인식도 더 커졌습니다. 그런 위험성은 개인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 찾아올 수 있으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서 평등, 공정과 정의를 구현하는 일의 중요성을 깨닫게 됐습니다. 어린이책의 측면에서, 그것은 작가·일러스트레이터 ‘선수 명단’을 더욱 포괄적으로 만들어 훨씬 더 많은 이야기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을 뜻합니다. 매우 느리고 힘든 과정이지만, 미국 어린이책 산업에서 ‘재현 또는 대표’(representation)는 고통스럽지만 천천히 과거의 ‘토큰주의’(tokenism·소수 집단을 끼워넣어 구색만 맞추는 것)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2년 전 나는 ‘한국계 미국인·디아스포라가 만드는 어린이책’(kiBooka.com)이란 웹사이트를 시작했습니다. 내가 처음 작가로서 경력을 시작한 1990년대 말에 미국 출판업체에서 책을 내는 한국인은 한줌에 불과했어요. 그런데 오늘날 제 웹사이트의 목록에는 70명도 더 되는 작가·일러스트레이터들이 있고, 새로운 이름들이 매주 올라옵니다. 제게는 정말 큰 즐거움이자 만족의 원천이에요!”

―당신은 로라 잉걸스 와일더의 <초원의 집>을 읽으며 완벽한 미국인이 되길 꿈꿨다고 했고, 그 책은 꽤 오랫동안 미국의 어린이 문학 ‘주류’에서 정전의 위치에 있었죠. 그러나 이제 세상이 변해, 미국도서관협회(ALA)는 작품 속 인종차별적 표현 때문에 로라 잉걸스 와일더의 이름을 자신들이 주던 상에서 빼기로 결정했습니다. 작가님은 <초원의 집>을 아시안계 소녀의 시각으로 새롭게 해석한 <초원의 연꽃>(2020)을 쓰셨죠. 이른바 ‘주류’ 문학에서 당신이 배웠던 것은 무엇인가요? 또 당신의 삶과 생각에 오랫동안 영향을 준 책들을 소개해줄 수 있나요?

“몇 년 동안, 제 작품 세계에서는 몇 가지 주제가 핵심으로 등장했어. 첫 번째는 ‘인생은 불공정하다’는, 단순하고도 보편적인 진실이에요. 인생은 불공정하고 우리는 종종 무기력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성장 과정에서 정말 중요한 부분이에요. 그러나 우리가 마음을 먹는다면, 불공정과 싸우는 방법을 찾을 수 있어요. 이 실타래는 많은 어린이문학을 관통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린이는 종종 사회에 의해 무력한 존재로 보여지지만, 좋은 이야기들은 그들이 그들의 힘으로 성장하도록 도울 수 있어요.
많은 작가들이 그들의 이야기들이 “만약에…”로 시작한다고 말하죠. 내 작품들의 경우엔 기본적인 아이디어가 “왜 안돼?”였어요. 미국 독자들의 흥미를 끄는 한국 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왜 안 돼? 남자 아이 말고 여자 아이가 주연을 맡는 야구 이야기는 왜 안 돼? 개척자들의 삶과 관련해 다른 관점들을 주는 책이 있으면 왜 안 돼? 내가 어렸을 때 읽었던 모든 책들이 백인 아이들에 대한 책들이었다는 사실로부터 이런 생각이 자라났어요. 그런 책들에선 백인 아이들, 특히 백인 소년들이 언제나 영웅이었어요. 그러니 저는 이렇게 물어야 했죠. ‘모든 다른 종류의 아이들이 주인공인 책은 왜 안 돼?’
궁극적으로는 아이였을 때 읽고 사랑했던 모든 책들이 내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셈이에요. 영감을 줬을 뿐 아니라 그것에 도전을 하도록 만들었으니까.”

―오늘날 어린이청소년문학에서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또 미국의 어린이청소년문학이 전 세계 어린이청소년문학에 기여할 수 있는 바는 무엇이라고 보는지요?

“역사에 대한 좁은 인식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과 직결됩니다. 수십 년 동안 학생들은 산업혁명이 인류 역사에서 극적인 진보의 시기였다고 배웠었죠. 그러나 산업혁명으로 환경에 얼마나 막대한 피해가 가해졌는지는 배우지 못했어요. 그 결과 많은 세대들이 환경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채 자라났고, 오늘날 우리는 그런 관점을 무시한 데 대해 끔찍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중입니다.
학생들이 배우는 미국의 역사는 특정한 거짓말을 너무 자주 반복해와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참이라 믿으며 자랍니다. 가장 근본적인 거짓말이, 말해질 가치가 있는 이야기들은 백인에 대한 이야기뿐이라는 것이죠. <초원의 연꽃>은 19세기 미국의 역사를 다른 렌즈로 바라보려는 시도였어요. 그 당시 혼혈 아시안 소녀에게 삶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한나의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더 온전한 진실에 기여할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해주길 바랍니다. 물론 한 권의 책만으로는 부족하죠. 우리에겐 다른 관점으로 쓰여진 더 많은 이야기들이 필요합니다.
말과 기호는 힘을 가지고 있어요. 와일더의 작품이 더 이상 어린 독자들을 위한 책 속에서 노력해야 할 기준을 대표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상에서 그의 이름을 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때 존엄과 존경을 부정당했던 사람들의 인격을 포함할 정도로 우리의 인식이 커지면, 우리의 말과 기호, 행동은 그런 성장을 반영해야 할 필요가 있어요.
미국인들은 일반적으로 높은 기준의 전문성과 생산성을 갖춘, 활기찬 어린이 출판 산업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 책들은 전 세계에 걸쳐 유통되죠. 불행한 것은 이것이 ‘일방통행’에 그친다는 사실이에요. 미국의 아이들은 다른 나라들에서 온 책들을 훨씬 더 많이 접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어린이청소년 관련 출판에선 번역에 더 적극적인 자금 지원이 이뤄져야 할 필요가 있어요. 케이(K)-드라마, 한국 영화, 일본의 아니메, 인도의 발리우드, 라틴 아메리카의 ‘텔레노벨라’(티브이 시리즈) 등에서 보듯 영화와 텔레비전 산업은 막대한 잠재력을 보여줬죠. 책 산업도 더욱 노력하면 잘 될 수 있을 겁니다.”

―최근 어떤 작품과 일들에 주력하고 있는지 말씀해주세요.

“저의 최근작 <The One Thing You'd Save>는 시조 형식을 활용한 두 번째 책이에요. 시조를 활용한 첫 번째 책은 <지붕 위에서 탭 댄스>라는 컬렉션이었어요. 이 책들은 내게 또 다른 “왜 안 돼” 도전이라 할 수 있죠. ‘시조가 하이쿠나 다른 형식의 시만큼 잘 알려지는 건 왜 안 돼?’
최근에 저는 또 다른 흥분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어요. 미국의 대형 출판사인 하퍼콜린스와 계약해, 새로운 출판 임프리트 ‘알리다 북스’(2023년 초 정식 출범 예정)를 설립하고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름인 ‘알리다’는 한국어에서 따온 거에요. 하퍼 클래리언의 편집장이자 부사장인 앤 호프와 함께, ‘알리다 북스’는 소외된 공동체의 창작자들을 발굴하고 그들의 책을 펴내고 홍보할 계획이에요. 창작자들이 ‘그들은 어때야 한다’는 어떤 종류의 기대에서든 벗어나, 그들의 열정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예술가들이 그들의 주제에 대해 열정을 가질 때, 아이들은 더 나은 책들을 얻게 되니까요.”

―디지털 미디어의 빠른 발전에 따라 아이들의 독서 경험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는 우려가 있습니다. 작가로서 당신 역시 이런 경험을 하고 있는지, 아이들이 책을 통해 더 풍부한 경험들을 할 수 있도록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어요.

“사람들이 책의 죽음을 예언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죠. 라디오가 독서를 죽일 거라는 생각도 있었어요. 영화와 텔레비전도 있었고요. 지금은 디지털 엔터테인먼트와 스트리밍이 그렇죠. 나는 인쇄된 책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 만큼 충분히 똑똑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이야기가 항상 중요할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배우고, 이야기를 통해 지식과 지혜를 전수합니다. 독서는 여전히, 우리가 이야기를 공유하고 다른 세계와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 중 하나입니다.”
정리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