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배급제 대학이 1등이 될 수는 없다

김덕한 사회정책부장 2022. 12. 5.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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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 원동력이었던 공정 입시
이젠 획일적 균등 집착으로 변질
서울대 예산, 하버드의 8분의 1
대학이 돈 모을 방법 찾아줘야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정문./조선일보 DB

미국 대통령이었던 존 F. 케네디와 조지 W. 부시 등은 냉정히 말하면 서민들의 ‘사다리’를 빼앗은 사람들이다. 하버드대와 예일대를 각각 나왔지만 그런 명문 대학에 입학할 만한 성적은 아니었다고 많은 이들이 입을 모은다. 그들이 동문이나 기여자에게 특혜를 주는 입시 제도를 활용했다는 사실을 본인들도 애써 부인하지 않는다. 공격 소재가 될 법도 하지만 정적(政敵)들조차 ‘뒷문 입학자’라고 비판하지 않는다. 대학엔 이런 저런 사람이 다양한 방식으로 입학하는 게 나쁘지 않다는 공감대가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엔 그런 식의 입시 전형이 없었기 때문에 기적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는지 모른다. 대학도, 산업도 모두 부족했던 시대에 명문대 입학까지 돈으로 가능했다면 산업화를 이끌 인재를 제대로 키우지도 못했을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공정이 가장 흔들리지 않았던 분야가 교육이었다는 사실은 산업화의 자산이었고, 사회의 역동성을 키워 계층 갈등을 풀어내는 통로 역할까지 했다.

문제는 이제 거의 전 국민이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을 정도가 됐고, 다양성과 창의성이 중요한 시대가 됐지만, 획일적 공정에 대한 강박이 더 강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0.1점이라도 높은 사람이 합격해야 한다는 집착은 학생부 종합전형조차도 어렵게 만들었고, 고교생들을 ‘반복 재반복 틀리지 않기 공부’에 더 매몰되게 하고 있다.

한국 대학은 입시뿐 아니라 거의 모든 면에서 획일적 공정을 강요받고 있다. 등록금도 교육부가 14년째 동결시켰다. 이제 어떤 정권이 들어서도 등록금 인상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돼 버렸다. 대학은 세금 지원 말고는 재원을 구할 방법이 마땅찮으니 정부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배급 경제 시대에 살게 됐다.

교육이 돈으로만 되는 건 아니지만 세계 유력 대학들은 피나는 돈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러니 한국 대학의 재정 취약성은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 미국 하버드대의 올해 지출 예산은 58억 달러(약 7조5400억원)인데, 서울대는 9410억원으로 8분의 1도 되지 않는다. 세계 최고 기업인 애플의 매출(약 500조원)에 삼성전자(약 300조원)가 따라 붙고 있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세계 속 우리 기업이 차지하는 위상과 한국 대학이 차지하는 위상은 이렇게 큰 격차가 있다.

미국 대학들은 재원을 스스로 조달한다. 하버드대 수입의 45%는 기부금이고, 수업료·기숙사비 등 등록금은 21%에 그친다. 서울대는 등록금 비중이 19%로 하버드와 큰 차이가 없지만, 정부 출연금이 57%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서울대의 등록금 수입은 지출하는 인건비의 절반도 되지 않을 만큼 규모 자체가 적으니 어차피 정부 출연금의 위력에서 벗어날 수 없는 구조다. 이런 식으론 세계 최고 대학과 경쟁할 자금력을 확보하는 건 불가능하다.

정부는 궁여지책으로 초·중·고교에 남아도는 지방재정교육교부금을 지자체로 내려보내 대학들을 지원하는 데 쓰게 할 작정이다. 이 예산을 따내기 위한 대학들의 사활을 건 다툼이 벌어질 것이다. 당장 급한 불은 끈다 해도 이런 식으로 대학을 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정부 지원, 사실상의 배급제를 통해 글로벌 톱이 된 분야는 찾기 어렵다.

우리 기업은 대기업 위주의 정부 주도 육성 정책으로 성장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글로벌 일류기업으로의 성장은 자율과 혁신을 통해 무한 경쟁을 이겨냈기에 가능했다. 대학도 이제 배급경제를 벗어나 대학 스스로가 가진 자산을 활용해 미래를 개척할 재원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대학 공동체의 기부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방법도 전향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대학 개혁의 방편은 실효성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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