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럼] WTO 통한 대미 통상협상력 강화가 IRA 해법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대한 한국에서의 논쟁이 뜨겁다. 이 법이 국제규범에 합치하는지, 법의 내용은 얼마나 세심히 구성되었고 실효성은 있는지, 이 법이 추구한 미국기업 보호에 얼마나 공헌할 수 있을 것인지, 중간선거 이후 이 법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지, 그리고 가장 피해가 예상되는 한국 자동차 기업의 대응방안은 무엇인지 등에 대한 찬반론이 뜨겁다.
2022년 8월 16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인플레이션 감축법'(Inflation Reduction Act of 2022: IRA)에 서명했다. 인플레이션 감축법은 내용과 절차 측면에서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내용면에서는 인플레이션 감축에 큰 효과가 없는 것으로 분석됐다.
인플레이션 감축법은 절차적인 면에서도 논란이 일었다. 바이든 대통령의 핵심 선거공약을 실행하기 위한 '더 나은 재건법'(Build Back Better America)이 조 맨신 민주당 상원의원의 내부반란표에 의해서 실패했다. 11월 8일 중간선거가 코앞에 다가오자 바이든 행정부와 민주당은 '더 나은 재건법'의 축소판 격인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공화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통과시켰다.
인플레이션 감축법에는 전기자동차에 대한 세액공제 형식의 보조금 조항이 있다. 크게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뉴클린 차량'(New Clean Vehicle)에 대한 8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그 중 7번 째 조건은 미국 내에서 최종 조립된 차량에만 보조금 혜택을 주는 이른바 '메이드 인 아메리카'(Made In America) 조항이다.
둘째, 핵심 광물 및 배터리 부품 조건을 충족시킬 경우, 각각 3,750달러씩 최대 7,500달러까지 납세자의 연말정산에서 세액공제가 된다. 핵심 광물은 알루미늄, 코발트, 리튬, 니켈 및 흑연을 말한다. 미국 또는 미국의 자유무역협정 체결국에서 채굴 또는 처리되거나 북미에서 재활용된 경우로 한정된다. 발효 즉시 40%, 매년 10%씩 증가하고 2027년부터 최소 80% 이상을 요구한다.
배터리 부품은 북미에서 제조 또는 조립된 것으로 한정된다. 발효 즉시 50%, 매년 10%씩 증가하고 2029년부터 100%를 요구한다.
여기에서 눈 여겨 볼 조항이 있다. 핵심 광물 및 배터리 부품 조건에 '우려 외국집단'(foreign entity of concern) 제한조건이 있다. 전자는 2025년부터 '우려 외국집단'에 의한 채굴, 처리, 재활용인 경우, 후자는 2024년부터 '우려 외국집단'에 의한 제조 또는 조립된 경우이다. 앞서 기술한 세 가지 조건으로 중국산 핵심 광물 또는 배터리 부품의 유입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 없는 경우를 대비한 것이다.
미국 에너지부는 인플레이션 감축법이 발효된 당일 '메이드 인 아메리카' 조건을 충족시킨 28개 전기자동차 명단을 공개했다. 그 중 독일(Audi, BMW, Mercedes), 스웨덴(Volvo), 일본(Nissan Leaf) 등 5개의 외국업체는 포함됐으나, 국내 전기자동차 업체는 제외되면서 차별논란이 일었다. 2023년 1월 1일부터 기존의 업체별 20만대 쿼터제가 폐지되면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테슬라 '모델 3' 차량 가격이 현대 '아이오닉 5' 차량보다 저렴해진다. 한·미 전기자동차 가격의 역전현상이 발생한다.
중저가 전기차 가격과 비교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지난 7월 미국의 자동차 전문잡지 카앤드라이버는 '2022년 가장 저렴한 전기차' 명단을 공개했다. 가장 저렴한 차는 2만달러 대의 닛산 리프이고 보조금 전액을 지급받는다. 3만~4만달러 대에서는 미국 차종만 보조금을 받고 한국 차종은 제외된다. 3만달러 대에서는 쉐보레 볼트 EV와 EUV의 가격이 현대 코나보다 저렴해지고, 4만달러 대에서는 포드 F-15 라이트닝의 가격이 기아 니로보다 저렴해진다. 바이든 행정부가 대중국 견제차원에서 시행한 보조금 정책 때문에 중간에 낀 한국 전기자동차 제조업체가 피해를 보는 상황이다.
인플레이션 감축법의 전기차 보조금 제도는 실질적으로 미국 내 전기차 보급 확대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첫째, 중국을 배제한 전기자동차 글로벌 공급망 개편은 현실적인 제약이 많다. 단기적으로는 차량 가격의 하락이 매출증가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중장기적으로 탈중국 정책이 차량가격 상승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둘째, 중산층은 비싸서 전기차 구입을 못하고, 고소득층은 세액공제 해택을 받지 못한다. 구매자의 연간수입 상한선이 있다. 개인은 15만달러, 세대주는 22만5000달러, 그리고 부부 합산은 30만달러이다. 미국 인구조사국 통계자료에 의하면, 2021년 중위 가계소득은 7만784달러이다. 중위 가계소득이란 소득기준으로 전체의 50%에 해당하는 가구의 소득을 의미한다. 미국의 자동차전문 평가업체 켈리블루북 자료에 따르면, 2022년 9월 미국 전기차의 평균가격은 6만5,291달러로, 고급차 평균가(6만5,775달러)와 거의 같다. 상기 수치를 단순비교하면, 미국의 중산층이 전기차를 구입하려면 연소득의 90% 이상을 지불해야 한다.
과연 테슬라 등의 미국 전기차 제조업체들은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진심으로 반길까? 테슬라에게는 큰 실질적인 혜택이 없다. 대부분의 차종이 보조금 지급상한액인 5만5,000달러(승용차) 및 8만달러(밴, SUV, 픽업트럭)를 초과하기 때문이다. 테슬라가 획기적으로 저렴한 가격대의 신규차량을 선보일 수 있겠으나, 그 또한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쉐보레, 포드 등의 중저가 미국 업체들에게는 외국계 회사와의 가격경쟁에서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모든 전기차 제조업체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문제도 있다. 핵심 광물 및 배터리 부품의 원산지 제한 규정이다. 인플레이션 감축법은 연도별 목표치를 구체적으로 명시한다. 전기자동차 핵심 광물 및 배터리 부품 시장에서 중국업체들의 영향력은 상당하다. 지나치게 무리하게 이행일정을 강행할 경우, 조달문제 때문에 오히려 미국업체가 손해를 보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예컨대, 유럽 또는 아시아 시장에서 값산 중국산 광물과 부품으로 만들어진 전기차량에 가격경쟁력에서 밀릴 수 있다. 지나친 '메이드 인 아메리카' 집착은 미국 기업의 글로벌 가격경쟁력 약화라는 자충수가 될 수 있다.
지난 8월 29일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에서 인플레이션 감축법의 세계무역기구(WTO) 또는 한·미 자유무역협정(KORUS FTA) 규정 위반여부를 묻는 질문에 "위반 소지가 아주 높고 필요한 경우에는 WTO 제소 절차를 진행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그는 "한·미 FTA 규정상 두 구제 절차 중 하나를 택하게 돼 있다"며 "두 개를 잘 비교해봐야 하겠지만 WTO로 가면 같은 입장인 일본, 유럽연합(EU) 국가들과 공조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고 덧붙였다.
WTO 분쟁해결 절차에는 문제점이 있다. 상소기구 재판부의 구성이 불가능하다. 현재 WTO의 상소기구 위원이 단 한 명도 없다. 'WTO 분쟁해결 절차에 대한 양해(DSU)' 제17조에 따라서 상소기구는 총 7명의 위원으로 구성되며, 재판부 구성에는 최소 3인 이상이 필요하다. 트럼프 행정부에 이어서 바이든 행정부도 신규위원 임명을 반대해 왔다. 미국입장에서는 자신들에게 불리한 판정이 자주 나오는 기존 시스템에 불만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미 FTA에는 자동차 분쟁에 관해서 두 가지 절차가 있다. 제22.4조의 일반분쟁 해결 절차와 부속서 22-가의 '자동차에 관한 대체적 분쟁절차'이다. 전자에 비해 후자는 장점이 많다. 60일의 협의 과정을 생략할 수 있고, 공동위원회에 즉시 회부할 수 있다. 또한 패널이 협정위반 또는 상대국의 합리적 기대가 무효화 또는 침해되었다고 판정하고 자동차 상품의 판매, 구매, 유통 등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줄 경우, 관세율을 FTA체결 이전수준으로 복귀할 수 있는 스냅백(snap back) 규정이 있다.
한·미 FTA 협상 당시, 미국 측에서 양국 간의 자동차 교역의 불균형 문제를 강력히 제기했고, 관세 및 비관세장벽의 상호제거에 합의했다. 현재 자동차 특별분쟁절차는 사용할 수 없다. 한·미 FTA 발효 후, 10년 내에 협정위반, 무효화 또는 침해에 대한 패널판정이 없는 경우에 자동적으로 종료되는 일몰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 일반분쟁 해결절차 패널 선정에 절차적 문제점이 드러났다. 제22.9조 제3항에 따라서 한·미 FTA 패널은 양국 추천 위원 각각 1명씩과 제3국 국적자 의장인 총 3명으로 구성된다. 주심 역할을 하는 패널의장은 합의로 선정하나, 합의가 안 될 경우, 최소 8명의 사전추천 후보자 명단에서 추첨한다.
2022년 9월20일자 SBS 뉴스는 2014년도 관보자료를 인용하면서 우리 측이 제시했던 의장 후보 네 명 중 한 명이 3년 전에 사망했으나, 아직 교체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현재 우리 측 추천 후보가 의장으로 추첨될 수 있는 확률은 50%(4/8)에서 43%(3/7)로 감소됐다. 3명이 다수결로 결정하는 구조에서 의장의 성향은 판정 결과에 큰 영향을 준다.
현 시점에서 인플레이션 감축법의 차별적인 보조금 지급정책을 시정하기 위한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추려볼 수 있다. 첫째, 법률 개정을 통해서 독소조항을 삭제 또는 수정하는 것이다. 한국정부 입장에서는 최선의 방법이지만, 현실성은 거의 없다. 미국 연방의회의 입법절차를 통과한 연방법을 행정부에서 수정할 법적 권한이 없다. 미국 연방헌법에서 규정하는 삼권분립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지난 9월 29일 조지아주 라파엘 워녹 상원의원은 인플레이션 감축법 수정법안(S. 5020)을 발의했다. 북미산 최종조립 조건을 2026년까지 유예하는 조항이 포함됐으나, 상원 통과여부는 희박하다. 궁극적으로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대한 미국 내 여론의 향배가 중요해진다.
둘째, 재무부 시행지침 마련과정에서 한국 기업에게 유리한 문구 또는 조항을 삽입하는 것이다. 1안보다는 현실성이 있기는 하지만, 이 또한 그리 녹녹치 않다. 대놓고 한국기업에만 특혜를 주는 표현이나 문구가 삽입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긴 어렵다. 지난 10월 24일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은 한국 전기자동차 차별조항에 대해서 "법에 그렇게 돼 있다. 우리는 법에 쓰여진 대로 시행해야 한다"라고 대답했다. 미국 재무부가 인플레이션 감축법의 구체적 연방지침을 2022년 12월 31일까지 제정 중이지만 재무부의 재량권은 매우 한정적이다.
현 시점에서 한국정부의 대미 통상협상력을 높일 필요가 있다. 양자와 다자 관점의 두 가지 방법을 제안한다. 첫째, 다자관계에서 규칙기반(rule-based) 국제질서 원칙을 확고히 보여줘야 한다. 미국정부를 WTO에 신속히 제소해야 한다. 상소기구 공백 등의 절차적 문제점에 불구하고, 인플레이션 감축법의 전기차 보조금 정책의 부당함을 모든 WTO 회원국에게 알리고 비슷한 입장에 있는 유럽연합, 일본 등의 다른 회원국들과 공식적으로 공동대처하면서 미국 정부를 전방위적으로 압박해야 한다. WTO의 비차별원칙 중에 하나인 내국민대우(NT) 개념을 활용하면 된다. WTO 다자협상 접근과 더불어 미국 정부와의 양자협상을 병행해야 우리 측의 협상력을 더욱 높일 수 있다.
둘째, WTO 분쟁해결절차 상소기구의 공백상황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유럽연합이 주도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다자간 임시상소중재약정'(MPIA)에 가입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MPIA는 DSU 제25조에 따라서 상소기구 역할을 한시적으로 대신한다. 미국과 일본을 제외한 EU, 캐나다, 멕시코, 중국 등 총 23개국이 가입했다. 미국 정부는 MPIA를 '중국-EU간 약정'(China-EU Arrangement)이라고 부르면서, 미·중 글로벌 패권경쟁의 일환으로 보고 있으나 대한민국 통상주권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MPIA 가입을 추진해야 한다.
MPIA 가입과 관련해서 최근 EU 입법동향을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 2021년 2월 13일 새로운 EU 무역집행규제(Regulation (EU) No. 2021/167)가 발효됐다. MPIA 비참여국(한국)이 EU와 WTO 분쟁에서 패소한 후, WTO 상소를 제기할 경우, EU가 일방적으로 보복관세 등의 보복조치를 취할 수 있는 법적근거가 마련됐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다자간 임시상소중재약정의 주요 내용과 시사점' 보고서에서, 상기 EU 무역집행규제의 입법화 전제하에, 현재 WTO 상소기구 전면중단 사태를 방치하는 'Appeal into the void' 전략보다는 WTO 분쟁해결절차(패널 및 상소기구)를 MPIA로 대체하는 방식을 추천했다.
EU판 인플레이션 감축법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보다 치밀하고 체계화된 글로벌 통상정책 수립이 필요할 때이다. ※본 기고의 원문 출처는 '동아시아재단 정책논쟁 186호' 임을 밝히며, 원문의 저작권은 동아시아재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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