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실의 서가] 한대수가 꿈꾸는 `행복의 나라`

박영서 2022. 12. 4.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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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싱어송라이터이자 포크 록의 개척자 한대수가 직접 말하는 자신의 삶, 사랑, 음악 이야기다.

생후 100일 때 아버지와 헤어졌던 한대수는 17세가 돼서야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후에 한대수는 아버지가 핵 물리학 연구와 관련되어 '브레인 워싱'(brain-washing)을 당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한대수는 아버지와 살고 싶어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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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 한대수 지음 / 아침이슬 펴냄

한국 최초의 싱어송라이터이자 포크 록의 개척자 한대수가 직접 말하는 자신의 삶, 사랑, 음악 이야기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실종된 뒤 혼란에 빠진 가족사, 음악과 사진에 몰입했던 시절, 두 번의 결혼에 얽힌 이야기 등을 솔직한 필체로 풀어냈다.

한대수는 명문가의 귀한 도련님이었다. 하지만 대저택의 외로운 소년이기도 했다. 그의 할아버지 한영교는 연희전문학교 설립자이자 신학대 초대 학장이었다. 아버지 한창석은 서울 공대를 다니다 1948년 핵 물리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 코넬 대학으로 유학을 떠난 수재였다. 어머니는 부산의 부유한 사업가 집안의 맏딸로 피아니스트였다. 그러나 한대수의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유학 중이었던 아버지의 편지가 갑자기 끊기면서 연락두절이 된 것이었다. 7년 후 집안의 결정으로 어머니는 재가했고, 집안 장손이었던 한대수는 조부모 밑에서 자랐다. 어린 한대수에는 깊은 외로움이 따라다녔다. 그러던 중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행방불명된 아버지를 미국에서 찾아낸 것이었다. 생후 100일 때 아버지와 헤어졌던 한대수는 17세가 돼서야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한국 말 등 여러 기억들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이는 지금도 의문이다. 아버지는 자신이 왜 이렇게 됐는지를 절대 밝히지 않았다. 후에 한대수는 아버지가 핵 물리학 연구와 관련되어 '브레인 워싱'(brain-washing)을 당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한대수는 아버지와 살고 싶어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한국 말을 전혀 하지못하는 아버지와 백인 새 어머니 사이에서의 미국 생활은 고통스러웠다. 이때부터 그는 시와 노래를 본격적으로 쓰고 만들기 시작했다.

책에는 바람처럼 살아온 한대수의 진솔한 모습이 담겨 있다. '물 좀 주소' '행복의 나라'가 어떤 계기로 창작되었는 지도 밝혀 독자들의 긍금증을 풀어준다. 1968년 한국으로 돌아와 음악활동을 했을 무렵의 서울 풍경도 무척 재미가 있다. 너무 인간적인 '히피' 한대수의 모습을 대면하면서 사랑과 자유와 희망이 충만한 '행복의 나라'로 떠나보자. 박영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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