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없는 스쿨존...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초등생 사망
4일 오후 4시쯤, 서울 강남구 청담동 한 초등학교 후문 10m 앞 도로 한 켠에 국화꽃, 백합, 안개꽃 등 조화(弔花) 20여 다발이 놓여 있었다. ‘친구야, 잊지 않을게!’라고 적힌 도화지에는 ‘미안하다, 지켜주지 못해서. 잘가’ ‘편하게 쉬렴’ ‘사랑해’같은 글귀가 적힌 포스트잇이 붙었다.
이곳은 지난 2일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숨진 이 학교 3학년 학생 A(9)군을 추모하기 위한 공간이다. A군은 방과후 수업을 마치고 하교(下校)를 하다 어린이보호구역인 학교 앞 도로에서 음주 운전 차량에 치여 숨졌다. 서울 강남경찰서는 만취 상태로 운전하다 A군을 치어 숨지게 한 30대 남성 B씨에 대해 특정범죄가중처벌상 어린이보호구역 치사 및 위험 운전 치사, 도로교통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B씨는 경찰 조사에서 “혼자 집에서 맥주를 마시다가 잠깐 차를 몰고 나갔다 왔다”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B씨는 A군을 들이받은 직후에는 사고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40m 가량 떨어진 자택으로 들어간 뒤, 주변이 소란스럽자 5분쯤 뒤 밖으로 나왔다가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당시 B씨의 혈중알코올농도는 면허취소 수준(0.08% 이상)으로 나타났다.
이 사고를 두고 학부모와 인근 주민들은 ‘예견된 참사’였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추모 공간을 마련한 학부모 40대 정모씨는 “학교 정문에서 후문에 이르는 길에 인도는커녕 안전 펜스조차 마련돼있지 않다”며 “이 학교 주변 도로에는 인도가 없는 곳이 많은데, 구청과 시에서는 각종 핑계를 대며 손을 놓고만 있었다”고 했다.
실제 본지 기자가 직접 돌아본 학교 인근은 보행자 옆으로 차량이 스쳐 지나가는 일이 빈번했다. 정문과 후문 사이 도로는 폭이 불과 5~6m 남짓으로, 인도도 없이 차량 두 대가 지나가면 가득 찰 정도로 좁았다. 학교 측에서 설치한 교통 안내 표지가 도로 끝에 설치돼있었지만, 안내 표지와 담벼락 사이 공간이 워낙 좁아 보행자도 결국 도로로 다녀야 했다.
특히 사고가 벌어진 이 학교 후문 앞 사거리는 차량 통행량이 많은 곳이지만 통행량에 비해 안전장치는 턱없이 부족했다. 주민 최모(80)씨는 “경사가 있는 도로다보니 특히 내리막길로 내려가는 차량은 쉽게 속도를 내는 경우가 많은데 사고가 난 지점 쪽에는 과속방지턱이나 과속 측정기가 없어서 불안했다”며 “아이들의 등하굣길인데 시청이나 구청에서 안전펜스라도 쳐줘야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자녀 셋을 이 학교에 보냈다는 학부모 신모(48)씨는 이날 이 학교에 재학 중인 6학년 딸과 함께 이곳을 찾아 “항상 학교 인근 길목이 위험하다고 생각해왔다”며 “학교 보안관이나 녹색어머니회가 나와 교통 관리를 해줄 때는 그나마 낫겠지만, 이번처럼 늦은 시간이나 등·하교 시간이 아닐 때에는 아이들이 바로 위험에 노출되니 불안한 마음이 크다”고 했다.
학부모들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학교와 구청 측에 수차례 알렸으나, 번번이 묵살됐다고 지적했다. 정문과 후문 사이 도로를 일방통행로로 지정하려 해도 토지 명목상 ‘상업지역’이란 이유로 무산됐고, 방지턱이나 과속 측정기를 추가 설치해달라고 건의해도 주민 반대 등을 이유로 들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날 추모 공간을 찾은 한 학부모는 “학교가 오래된 탓에 인도를 설치할 공간이 마땅치 않았던 부분도 있지만, 강남구와 서울시의 행정이 소극적이었다”고 했다. 이어 “아이를 지켜주지 못해 어른으로서 미안한 마음이 크다”며 “이번 사고를 계기로 해서라도, 더는 피해가 없도록 학부모들이 힘을 모아 안전 확보에 나설 것”이라고 했다. 이들은 필요할 경우 학부모 연서명을 비롯한 집단 행동에도 나설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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