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문에 등장한 호모 사케르

한겨레 입력 2022. 12. 4. 18:25 수정 2022. 12. 4.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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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서울 서초동 대법원.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세상읽기] 류영재 | 대구지방법원 판사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는 현대 사회에서 상식이 된 개념이지만 정확한 뜻을 파악하기 쉽지 않다. 현실에서 구현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헌법재판소는 민주주의를 가리켜 ‘시민의 자기 지배’라고 말했다. 시민의 자기 지배란 무엇인가. 시민이 스스로 자신을 지배한다는 의미다. 왕이나 귀족, 독재자, 자본가 등의 지배권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시민 개개인이 피지배자로 전락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대통령은 통치 권한을 행사할 수 있지만 지배자로 군림해선 안 된다. 지배하지 않으면서 통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에서 등장하는 것이 법치주의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법은 시민이 선출한 국회가 만들고, 통치 권한은 법의 지배를 받는다. 자의에 의한 통치는 금지된다. 통치기관이 법을 제 입맛에 맞게 해석·적용하여 시민을 지배하는 방식도 허용되지 않는다. 법을 이용하는 통치는 법에 의한 통치가 아니다. 한편,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다수에 의하여 소수가 지배당하는 상황도 경계된다. 다수가 원하는 법이나 통치가 소수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다수에 의하여 소수자 개개인의 권리와 자유가 본질적으로 침해당한다면 그 소수자들은 피지배자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수결 원칙의 전제로서 소수자 보호가 강조되고, 사법은 헌법상 보장되는 소수자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호하는 것을 핵심적 역할로 삼는다.

다수의 의사가 반영되는 법과 제도를 마치 불변하는 십계명처럼 떠받들며 이는 무조건 지켜져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 법치주의는 아니다. 그보다는 자의적인 통치로 인해 시민이 피지배자로 전락하지 않았는지, 다수가 만족하는 법제도에 의해 소수의 권리가 본질적으로 침해당하지 않았는지를 끊임없이 살펴 시민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실질적으로 보장되도록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그에 맞추어 법을 해석·적용하려는 노력이 법치주의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실제로 그러한지는 의문이었다. 사법부의 일원이지만 사법이 법을 해석·적용함에 있어 소수자의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역할을 해내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았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다수의 이익에 복무하고 고통받는 소수를 외면해오지 않았던가. 추상적인 법 논리를 내세워 권리가 유명무실해지는 것을 모른 체하지 않았던가. 다수자의 논리가 소수자의 삶 곳곳에 벽을 세우는 상황을 사법이 어느 정도 헤아렸는가. 냉소하면서 정작 내 재판에서 배운 바를 실천하려는 치열한 노력은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성전환자의 성별 정정을 미성년 자녀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불허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결정(대법원 2020스616 전원합의체 결정, 다만 이 사안은 성전환자가 이혼한 상태였음)이 나왔다.

결정문에서 대법관들은 성정체성 확립 및 확립된 성별을 공식적으로 확인받는 행위가 인간의 존엄에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깊은 이해를 보인다. 소수자의 권리가 실질적으로 보장되기 위해 어떠한 제도적 기반이 필요한지, 소수자 보호를 위하여 사법이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 살핀 뒤 해야 할 바를 결단한다. 나는 왜 이렇게 치열하지 못했는가 반성하게 만드는 결정이었다. 결정문 중 인상 깊었던 부분을 소개하며 이 글을 닫는다.

“사법은 다수결의 원칙이 지배하는 입법이나 행정과 달리 다수의 정치적·종교적·사회적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소수자를 보호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최후의 보루로서의 역할을 할 때 그 존재 의의가 있다.”

“이제는 이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의 대우를 요구하는 그들의 절박한 외침을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되며, 그들을 호모 사케르(Homo Sacer, 희생제물은 아니지만 살해당했을 경우 아무도 그 살인의 책임을 지지 않는 존재. 의역하자면 법의 영역에서 배제되어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존재를 의미한다) 상태에 방치하여서도 안 된다. 성전환자들이 성정체성에 맞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별 정정이 필수적임에도, 이를 거부하는 것은 그들의 인간 실존을 부인하고 벼랑 끝으로 내모는 일이며, 나아가 민주주의 사회가 추구하는 자유와 평등,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이라는 가치의 핵심을 훼손하는 일이라는 것을 깊이 자각하여야 한다. 성별 정정을 비롯하여 성전환자들이 이 사회 안에서 우리의 평범한 이웃으로 살아갈 수 있는 제도적 토대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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