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먹는가 - 下 [뉴트리노의 생활과학 5]
‘발효의 과학’은 음식의 장기 저장과 맛 향상을 통해 요리 발달에 기여
요리의 과학, 그 두 번째 순서입니다. 지난번에는 주로 불과 물의 물리적·화학적 법칙이 적용되는 과정을 알아보았습니다. 고기·채소 등 식재료에 열과 압력을 가하면 분자 수준의 변형이 일어나 사람이 소화하기 쉽고 맛있는 음식으로 바뀝니다. 이것이 요리의 탄생이라고요. 그런데 불의 발견 못지않게 요리사(史)에 큰 영향을 준 또 하나의 과학적 현상이 있습니다. 바로 발효(醱酵, fermentation)입니다.
발효는 사실 부패와 같은 미생물의 영양분 분해 과정이지만, 인간의 기준에서 유리한 부패는 발효라고 특별히 따로 부르는 것뿐입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우리 김치도, 서양인들의 치즈도 살짝 ‘썩은’ 음식인 셈이죠. 고기나 생선을 숙성시키면 더 맛이 좋아진다고 하죠? 숙성이 바로 효소의 작용으로 발효가 일어나는 과정입니다. 숙성의 정도를 잘 조절해야지, 그렇지 못하고 과(過)숙성하면 부패로 진행됩니다. 적당한 발효는 가열 요리처럼 식재료를 맛있고 소화하기 쉽게 바꾸어 줍니다. 젖산 발효는 수소이온 농도를 변화시켜 시큼하고도 독특한 냄새와 맛을 풍기게 만듭니다. 초산 발효는 톡 쏘는 식초를 생산합니다. 알코올 발효는 사회의 합법적인 경(輕)마약 ‘술’을 인류에게 선사해 주었습니다. 이번 시간은 발효의 과학에 대해 공부해 봅시다.
발효 식품의 정의는 ‘동물 또는 식물의 원재료를 효모, 유산균, 곰팡이 같은 미생물을 이용해 변형한 식품’입니다. 우리 몸을 이루는 세포 전체가 10조 개인데, 미생물은 100조 개라고 합니다. 온갖 잡균들이 살고 있는 것이죠. 집마다 장맛이 다르다, 사람마다 손맛이 다르다고 하는 건 곳곳에 서식하고 있는 균들이 모두 조금씩 다르기 때문입니다.
가장 사랑받는 발효인 알코올 발효부터 살펴봅니다. 술의 탄생은 아마도 포도 같은 과일이나 쌀 등 곡물이 적당한 온도에서 수분과 함께 장기간 방치되고 난 후 풍기는 알코올 냄새에 초기의 인류가 끌려온 우연에 의한 것이라 짐작됩니다. 알코올 발효는 산소가 차단된 상태에서 효모 등 미생물에 의해 곡물·과일 속의 당류가 분해돼 알코올(에탄올)과 이산화탄소로 생성되는 과정입니다. 식물이 장기 저장하려고 만든 다당류인 녹말(전분)이 누룩에 의해 포도당이 되고, 다시 효모에 의해 10단계 효소 반응을 거치면 피브루 산이 나옵니다. 이것이 다시 2단계 더 효소 반응을 하면 에탄올이 만들어지는 것이죠. 막걸리, 청주, 맥주, 포도주 등은 모두 알코올 발효의 산물입니다. 효모 등 미생물의 발효를 이용한 술을 양조주라고 합니다. 양조주는 모두 알코올 도수가 15~18%를 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발효균이 더 높은 농도의 알코올 속에서는 죽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술꾼들이 좋아하는 독한 술을 만들려면 이들 첫 번째 술을 끓여서 고농도 알코올만 남겨야 합니다. 이를 증류주라고 하고 소주, 고량주, 위스키, 브랜디 등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술을 마실 때마다 작은 미생물들의 노고에 감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미생물은 당분을 분해해 ATP 에너지를 얻으려 하는 과정에서 부산물로 알코올을 남길 뿐이지만 말이죠.
젖산 발효는 요리의 과학 중 가장 맛있는 발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절이고 재우고 삭혀 먹는 대부분의 음식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필수 식품으로 꼽히는 장(醬)과 젓갈류는 오랜 세월 곰삭은 조상의 지혜를 보여줍니다. 서양에는 치즈와 피클, 요구르트류가 대표입니다. 간장·된장·고추장과 에멘탈·모짜렐라·고다 치즈는 그 나라의 음식 문화를 압축해 보여준다고 할 수 있죠. 중국의 두반장, 태국의 피시소스를 생각해 보세요. 프랑스의 블루치즈, 아이슬란드의 삭힌 상어 하우카르는 미식의 상징입니다. 우연히 혹은 의도적 발명이든 간에 젖산 발효는 음식의 저장 기간을 크게 늘려 인간의 활동 범위를 넓히고 혹한·혹서 등 가혹한 날씨에도 풍부한 영양소를 섭취할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이런 실용적 목적뿐 아니라 발효 과정에서 생긴 ‘어른의 맛’은 혀의 즐거움을 몇 배로 늘려주었습니다. 흔히 커피, 술과 더불어 발효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면 이제 어른이 됐다고 여기는 관행이 있죠. 누렇게 띄운 청국장, 삭힌 홍어는 물론이고 곰팡이가 핀 블루치즈, 시큼한 요구르트 같은 ‘냄새나는’ 음식은 아이들은 꺼리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발효 음식을 만들 때 ‘숙성한다’는 표현을 쓰는데요, 성숙해야 숙성 음식을 먹을 수 있나 봅니다.
마지막으로 초산 발효는 알코올 발효로 생긴 에탄올이 한 번 더 산화 발효되면 초산을 생산하는 과정입니다. 술이나 음식이 시다, 상한 냄새가 난다 하는 게 이 초산 때문입니다. 코로 냄새를 맡아 식용 불가 ‘썩었다’ 판단을 내리는 1차 관문인 초산, 즉 식초는 동시에 음식의 저장과 맛 향상을 위해 필수적인 요리의 상비군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식재료를 과학적·문화적으로 가공하는 과정, 즉 요리는 종합 학문입니다. 아삭아삭, 폭신폭신 같은 음식의 식감은 물성, 즉 물리적 현상입니다. 고소한, 달콤한 음식의 맛과 향은 화학적 현상입니다. 음식을 통해 섭취하는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은 생화학적 성분입니다. 음식을 먹고 느끼는 행위는 뇌의 생리적 현상입니다. 이렇게 요리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려면 물리, 화학, 생화학, 미생물학, 생리학, 심지어 인문학적 지식까지 필요한 것이죠. 다음번에는 맛과 향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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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열 기자 nosr@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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