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겨울 친구네 함바집의 식탁

박찬일 2022. 12. 4.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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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의 ‘밥 먹다가 울컥’] 중고 패널로 얼기설기 못질해서 만들고, 탁자가 기우뚱하던 그 현장의 밥이 자꾸 생각난다. 해표식용유 부어 부치던 달걀말이에 시골 된장 풀고 시금치 넣고 끓인 국이 놓인 그 식탁이.
고봉밥을 퍼서, 반찬 몇 가지에 찌개 담은 냉면 그릇을 놓고 훌훌 먹던 그들의 표정이 떠오른다.ⓒ연합뉴스

고등학교 때 친구 하나가 담임선생님께 불려 나갔다. 선생님은 심각한 얼굴이었다. 녀석은 교무실에서 돌아온 후 가방을 싸서 집으로 갔다. 아버지가 다쳤노라고 했다. 친구의 아버지는 경기도 남부에서 함바집을 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사업에 다 실패하고 마지막으로 던진 승부수였다. 빚을 내어 권리를 땄다고 했다.

그 전에, 그 친구랑 현장에 간 적이 있었다. 고등학생이 공부는 안 하고 거길 뭐 하러 갔는지 모르겠다. 황량한 들판에 불도저 같은 중장비가 몰려와 검은 연기를 뿜으며 터 잡기 공사를 하고 있었다. 1980년대의 흔한, 택지개발 현장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봉두난발을 하고 가설 식당을 지으랴, 이미 들어온 ‘인부’들 밥해대랴 정신이 없었다. 아들 친구들이 갔는데도, 어서 오라는 말도 못하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나도 얼떨결에 가설 식당 ‘반네루’(나무 패널)에 못질을 하는 데 붙들려서 힘을 썼다.

그런 가설 식당을 함바집이라고 불렀다. 어떤 관행인지는 모르겠으나 현장사무소인지 건설회사인지 뒷돈을 좀 내고 적당히 현장 함바 영업권을 받아서 식당을 하는 일이었을 거다. 인부들이 늘어나면 가설 식당을 뚝딱 더 지었고, 공사가 파장이 되면 그 패널, 판자때기를 훅 뜯어서 다른 곳으로 가서 다시 지어 장사를 한다고 했다. 내 친구는 공사가 뜸한 겨울을 빼면 아버지 얼굴을 거의 보지 못하고 살았다. 그런 아버지가 밥값을 받지 못해서 현장사무소에다 대고 크게 항의를 한 모양이었다. 돈을 떼이고 당신이 몸으로 대들다가 폭력이 생겼던 것 같았다.

기억나는 건, 식사시간이 되어 줄줄이 인부들이 들어와 가설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풍경이다. 고봉밥을 퍼서, 반찬 몇 가지에 찌개 담은 냉면 그릇을 놓고 훌훌 먹던 그들의 표정이 떠오른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낡은 작업복에 너나없이 쓸쓸한 식욕으로 밥을 입속에 퍼넣던 장면들.

그 가설 식당에 부엌이란 게 제대로 있을 리 만무했다. 식당 뒤편에 시설을 대충 해놓았다. 펄럭이는 천막 천으로 날아드는 먼지만 대충 막은 채 김치를 담그고 거대한 석유 버너에 국을 끓이던 아줌마들이 생각난다. 소음과 찬바람이 그대로 얼굴을 때리던 그런 황막한 현장까지 가서 밥하는 사람들의 사정이 오죽했을까 싶기도 하다. 지금 생각해보니. 밥하는 이나 먹는 이나 누구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는 게 내 기억이다.

당시에 나는 ‘함바’가 우리말인 줄 알았다. 밥을 뜻하는 항(飯)에 장소를 뜻하는 바(場)가 붙은 일본말 ‘항바(또는 한바)’가 ‘함바’로 굳어졌다는 건 나중에 듣게 되었다. 2010년대 들어서는 ‘함바 게이트’란 말이 뉴스를 시끄럽게 했다. 21대 총선 당시 인천 미추홀구의 윤상현 의원이 함바 업자에게 돈을 받은 혐의로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가 되기도 했다. 판자때기 함바집이 정치권에 로비도 하는 규모로 커진 것이다.

‘건설급식’으로 말이 바뀌었지만

그 사건이야 어찌 되었든, 막막한 들판에 세워진 나무 판자때기 가설 식당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그게 ‘게이트’까지 되는 일인지 납득할 수 없었다. 하지만 1980년대의 주택 건설과 신도시급 초대형 단지를 짓는 2000년대의 함바를 비교하는 건 우스운 일이다. 건설현장 급식 또는 건설급식이라고 말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걸 함바라고 부른다. 그 낡은 엉터리 일본어가 여전히 1970~80년대 건설현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의 의식을 보여준다. 기사식당과 함께 함바집 밥맛이 유달리 좋다는 사회의 인식도 여전했다. 그래서인지 함바라는 말은 살아 있어서 거대한 규모가 된 건설급식 비리를 함바 게이트라고 부르는 게 아닌가.

함바집 밥은 정말 맛있다는 중론이 있다. ‘노가다’ 밥이니 푸짐하고 열량이 높았으며 입 깔깔한 사람들 밥을 대충 지어서는 못할 일이라는, 그래서 밥맛 잘 내는 선수들이 뛰는 무대라는 인식이 있었다. 작은 급식소에 가면 함바 출신이라는 아주머니 요리사들이 환영받는다. 맛 제대로 낼 줄 아는 기술자 대우를 받는 셈이다. 그러나 건설급식으로 말이 바뀌면서 아마도 그런 평판은 잃어버린 듯하다. 단가 맞춰 대형 기계로 밥을 짓고, 밥맛이 없기로 유명한 대기업 급식 계열사도 진출해서 한다는데 무슨 맛이 있겠는가. 우리나라 급식 규모는 대충 20조원쯤 되고 건설급식 규모는 2조원 가까이 되는 모양이다. 큰 시장이다. 그러니 게이트도 생기고 그러는 것이겠지.

함바집이 따라붙을 정도면 옛날에도 현장이 어느 정도 크기가 되어야 했다. 대도시에서 연립이나 다세대 몇 개 짓고, 10층짜리 빌딩 하나 짓는 데는 함바도 없었다. 공간을 우선 확보할 수 없었고, 식구 수가 얼마 안 되니 남는 게 없었다. 그런 현장을 뛰는 인부들은, 아니 건설노동자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현장에서 가까운 밥집을 찾아서 함바 삼아 밥을 먹는다.

선친은 이런저런 일을 닥치는 대로 하셨는데, 1980년대 당시 많이 생기던 독서실, 피아노 학원이나 보습학원의 실내장식을 하는 업도 했다. 장식이랄 것도 없이, 이런저런 구조물을 세우고 바닥과 칸막이를 치는 일이었다. 그냥 막일이었으며 건설현장 일과 비슷했다. 바닥에 ‘공구리(콘크리트)’를 부어 양생하는 일도 하셨으니까. 그러다가 그 학원 같은 게 망하면 철거해주는 일도 같이 하게 마련이었는데 나도 종종 아르바이트 삼아 나가곤 했다.

아버지는 유리섬유가 잔뜩 들어간 방한·방음용 나무 칸막이를 쇠 연장인 ‘빠루(쇠지렛대)’ 같은 걸로 쳐서 뜯어내고 판자와 유리를 깨고 바닥에 깔린 ‘모노륨’을 걷어내곤 했다. 마스크 같은 건 없었고, 먼지가 자욱해서 옆 사람 얼굴도 잘 안 보이는 가운데 그 일을 했다. 그러고는 툭툭 털고 밥 먹으러 가자고 하셨다. 함바집 삼아 대놓고 가시던 서대문 통술집에 앉아 아버지는 연탄불에 돼지갈비를 구워 자꾸만 내게 밀어주었다. 당신은 맑은 25° 진로소주를 들이켜시면서.

아버지가 나중에 쓰러진 것도 아마 그 유리섬유가 큰 몫을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폐를 작살내는, 그래서 나중에 사용이 금지된 악마의 솜덩어리를 아버지는 예사로 만지고 자루에 쑤셔 넣고, 때로는 신축 학원이라면 목장갑 낀 손으로 새 유리섬유를 뜯어서 시공하기도 했으니까.

함바집으로 망해버린 내 친구 아버지나 도시의 함바집에서 저녁술을 드시던 아버지나 다 세상에 안 계신다. 함바집 밥도 맛이 없어졌다. 중고 패널로 얼기설기 못질해서 만들고, 바닥은 그대로 흙이어서 탁자가 기우뚱하던 그 현장의 밥이 자꾸 생각난다. 신김치 넣고 볶아서 윤기 흐르던 제육볶음 하며, 해표식용유 부어 부치던 달걀말이에 시골 된장 풀고 시금치 넣고 끓인 국이 놓인, 그 겨울 친구네 함바집의 식탁이.

박찬일 (셰프)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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