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쥐 떼가 우르르"…죽음에서 피어난 소리의 정체 [김수현의 THE클래식]
투명하고도 깨끗한 선율로 ‘동심·순수함’ 표현 극대화
피치카토·스타카토 잦은 사용…발랄한 분위기 형성
오케스트라 ‘8개의 모음곡’ 흥행…독자적 영역 구축
연말만 되면 어김없이 전 세계 유명 무대에 잇따라 오르는 불후의 작품이 있습니다. 바로 러시아 작곡가 차이콥스키의 음악이 담긴 발레 ‘호두까기 인형’이 그 주인공입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공연장 문 앞은 부모의 손을 잡고 환하게 웃는 아이들로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12월을 배경으로 밝은 분위기를 자아낼 뿐만 아니라 ‘오네긴’ ‘백조의 호수’ 등 여타 고전 발레 대비 단순한 스토리 라인을 갖추고 있는 것이 인기 요인으로 꼽힙니다. 독일 작가 호프만의 소설 ‘호두까기 인형과 생쥐 왕’을 각색한 작품으로 크리스마스이브에 호두까기 인형을 선물 받은 한 소녀가 꿈속에서 왕자로 변신한 호두까기 인형과 함께 생쥐 떼를 물리치며 모험을 떠나는 내용을 그리고 있죠.
동화적 요소가 많은 만큼 ‘호두까기 인형’ 무대가 어른의 시선을 끌기엔 역부족일 것이라 예단할 수 있지만 화려한 발레리나의 몸짓과 차이콥스키 특유의 세련된 음악이 거대한 오케스트라로 구현되는 만큼 성인의 시각과 청각을 만족시키기에도 부족함이 없다는 게 중론입니다. 다만 평소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약간은 생소한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평생 애수가 진하게 배어있는 선율을 가득 적어낸 그가 이 작품에서만큼은 천진난만하고도 밝은 선율로 작품 전체를 채웠기 때문이죠. 그 이유는 차이콥스키가 ‘호두까기 인형’ 작곡 당시 놓였던 배경에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여동생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그에 대한 애틋함으로 작품을 완성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동생과의 추억이 녹아있는 어린 시절, 순수한 마음과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순간의 소중함을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남긴 차이콥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수많은 실패와 상처, 생채기에도 어리광은 허용되지 않는 차가운 사회를 살아가는 어른들에게 동심의 세계를 그대로 담아낸 ‘호두까기 인형’은 깊은 울림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따뜻한 분위기 속 맑고 투명한 선율이 환희의 감정을 넘어 온 마음을 벅차게 만드는 음악, 차이콥스키의 ‘호두까기 인형’을 가까이 들여다보겠습니다.
차이콥스키, 상실의 고통 속에서 세기의 명작을 쏟아내다
먼저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ich Tchaikovsky, 1840~1893)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차이콥스키는 19세기 러시아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로 7세 처음 피아노를 접하는 시기부터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음악가로서의 장래를 원치 않았던 부모에 의해 법률학교에 입학한 그는 19세가 되던 해인 1859년 법무성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게 되죠. 그러나 음악에 대한 열정을 멈출 수 없던 그는 업무 외 시간을 활용해 러시아 음악 협회에서 개설한 음악 교실에서 학업을 이어갑니다.
이후 음악가로서의 길에 확신을 얻은 차이콥스키는 법무성을 사직하고 정식으로 승격된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정식 등록하며 클래식 음악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이게 됩니다. 졸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직을 맡은 그는 장시간 이어지는 수업에도 작곡 작업에 누구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음악가로서 늦은 출발에도 탄탄히 기본기를 쌓은 덕에 그는 바이올린 협주곡, 피아노 협주곡, 교향곡 6번 ‘비창’을 비롯해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 발레 음악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 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 등 세기의 걸작을 대거 탄생시키는 업적을 남기게 됩니다.
음악가로서 크게 성공한 거장이었으나 이와 별개로 그의 삶은 비극의 연속이었습니다. 그에게 놓인 슬픔과 고통이 명작을 탄생시킨 배경이라는 해석까지 나올 정도죠. 차이콥스키는 1854년 14세 어린 나이에 가장 소중한 존재였던 어머니를 여의게 됩니다. 병명은 콜레라. 깊은 절망감에 휩싸인 그가 괴로움을 견디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바로 음악을 작곡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그의 첫 작품 ‘왈츠’는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에서 탄생하게 됩니다. 인간이 느끼는 최절정의 고통을 담아낸 그의 마지막 작품 ‘비창’ 또한 죽음에 대한 인식을 토대로 쓰인 작품으로 여겨집니다.
과거 차이콥스키가 어머니와 같은 병명으로 사망했다고 알려졌으나 그가 동성애자였단 사실을 알게 된 권력에 의해 자살을 강요받았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으면서 죽음을 앞둔 차이콥스키의 참담한 심경이 표현된 작품으로 해석되고 있죠. 그리고 또 하나. 차이콥스키의 3대 발레 음악 중 하나인 ‘호두까기 인형’ 또한 사별의 아픔 속에서 피어난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작곡 의뢰만 받고 작업에 그렇다 할 진척을 내지 못했던 차이콥스키는 여동생의 사망 소식을 듣고서 그에 대한 애도의 마음과 조카에 대한 애정을 담겠다는 일념으로 작품을 완성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 영향으로 이 작품은 ‘동심(童心)’의 결정체만 선별해 음표로 적어낸 듯 순수하면서도 청아한 선율과 극적인 구성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동화 속에 들어온 듯 환상적인 분위기에 특유의 세련된 선율까지 끌어내면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청중의 감탄을 자아낸다는 차이콥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발레 음악으로 쓰이는 작품의 경우 약 90분에 달하는 만큼 오케스트라 무대에서는 차이콥스키가 직접 발췌한 모음곡 작품이 주로 올려집니다. 이는 발레 무대보다도 호평받은 작품으로 유명하죠. 그럼 차이콥스키의 마음속 가장 순수하고 찬란한 부분을 떠낸 듯한 선율로 청중으로 하여금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의 변화를 불러일으킨다는 ‘호두까기 인형’ 모음곡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유려한 선율과 섬세한 표현력…최상의 아름다움 구현
‘딴 따단 단딴딴딴’ 첫 작품 <작은 서곡>은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가벼운 스타카토(한 음씩 끊어서 연주하는 기법) 연주로 시작됩니다. 밝은 음색을 유지하기 위해 첼로는 등장하지 않죠. 통통 튀는 현악기의 소리가 이어지면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듯 아기자기한 분위기가 연출됩니다. 여기에 맑고 투명한 음색의 플루트와 클라리넷이 더해지면 다시 바이올린이 서정적인 선율을 연주하면서 화려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또렷하면서도 명쾌한 트라이앵글 소리가 특별한 날이 다가왔음을 전하면 16분음표로 구성된 선율이 빠르게 움직이면서 작품이 밝고 쾌활한 분위기로 이어질 것을 넌지시 알립니다.
이후 이어지는 작품은 <행진곡>입니다. 트럼펫이 셋잇단음표를 사용해 행진곡의 맛을 살리면 리듬감 넘치는 현악기 선율이 더해지면서 장난스러우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아이들이 트리를 가운데 두고 걸어 다니는 장면에서 쓰이는 음악인 만큼 무겁지 않으면서도 절도 있는 선율이 진행됩니다.
그 뒤로 등장하는 곡은 <사탕 요정의 춤>. 현악기가 아주 작은 소리로 4마디의 피치카토(활 대신 손으로 현을 뜯어 연주하는 기법)를 연주하면 신비한 음색을 머금은 첼레스타의 선율이 등장합니다. 하프보다 명확하고 단단한 울림을 지는 첼레스타의 독특한 소리는 청중에게 궁금증을 유발하는 요소로 작용합니다. 차이콥스키는 이 악기를 파리 여행 중 발견해 악보에 적어넣었는데 관계자들에게 작품 공개 전까지 첼레스타의 존재를 비밀로 하라고 신신당부했다고 합니다. 일종의 비밀병기였던 셈이죠. 차이콥스키의 믿음에 부응하듯 첼레스타의 등장은 아주 무거운 소리의 금관악기와 대비되면서 발레의 가벼운 몸짓을 더욱 극대화하는 효과를 불러일으킵니다.
<러시안 춤>에서는 무용수의 빠른 발놀림과 큰 손동작을 표현하기 위해 셈여림에 잦은 변화를 주는 것을 특징으로 합니다. 시작부터 8분음표와 16분음표로 이루어진 특색 있는 선율이 연주되면서 긴장감을 유도하는 동시에 신나는 분위기를 형성합니다. 중간에 탬버린 소리가 더해지면서 극의 흥을 돋우면 곡 진행에 점차 속도가 붙는데, 이때 무용수의 끊임없는 회전이 이어지면서 시각과 청각을 모두 자극하는 효과를 이끕니다. 다른 악곡에 비해 짧은 편이지만 워낙 빠르고 힘 있게 선율이 진행되는 탓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으로 여겨집니다.
<아라비아 춤>은 약음기로 특유의 얇은 소리를 구현해낸 첼로와 비올라가 작은 북소리를 치듯 일정한 리듬을 연주하면서 시작됩니다. 이윽고 두꺼운 소리의 잉글리시 호른이 아라비아풍의 단순하면서도 고풍스러운 주선율 연주하면 바이올린이 이를 받으면서 더욱 풍부한 음색을 구현합니다. 탬버린이 이따금 나타나면서 곡에 활기를 불어넣으면 잉글리시 호른과 바순이 다시 어두운 음색을 표현하면서 무거우면서도 신비로운 작품의 분위기를 끝까지 유지합니다. 이후 등장하는 <중국 춤>에서는 바순이 아주 낮은 소리로 8분음표를 연주하면 고음역의 플루트와 피콜로가 빠르게 상행하면서 새가 하늘 위로 솟아오르듯 힘찬 분위기를 형성합니다.
이때 현악기는 피치카토 연주로 맑고 청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이때 금속으로 된 건반악기인 글로켄슈필의 소리가 더해지면서 더 명료해진 선율이 귀를 사로잡습니다. 피치카토를 곡 전체에 배분해 마치 물방울이 튀는 것 같은 약동감을 구현한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갈대피리의 춤>에서는 3대의 플루트가 만들어내는 하나의 화음이 서정적인 선율을 타고 흐르면서 바람결에 휘날리는 아름다운 갈대의 모습을 형상화합니다. 극적인 구성은 다른 곡에 비해 많지 않으나 명료한 선율이 플루트의 맑은 음색으로 연주되면서 청중으로 하여금 동요를 듣는 듯한 순수한 감정을 자아내는 작품으로 간주됩니다.
이후 등장하는 <꽃의 왈츠>는 전체 악곡 중 서정적인 선율과 섬세한 표현력이 최절정에 달하는 클라이맥스 작품으로 꼽힙니다. 오보에와 클라리넷, 바순, 호른이 4분음표로 구성된 단순한 선율을 연주하며 안정적이면서도 포근한 분위기를 자아내면 영롱한 하프 소리가 상행과 하행을 반복하면서 마치 연못에 물방울이 차례로 떨어지듯 아름다운 선율을 선사합니다. 이후 17마디 동안 하프 홀로 연주하는 구간에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면 비로소 현악기 저음부에서 3박자 리듬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왈츠가 시작됐음을 알립니다. 그 위에 호른과 클라리넷이 기품있는 음색으로 매혹적인 왈츠 선율을 연주하면 플루트와 클라리넷이 다섯잇단음표를 소화하면서 전체 악곡의 화려함을 극대화합니다.
이후 첼로가 처음으로 애수 어린 서정이 가득한 선율을 선보이면서 서글픈 아름다움을 표현합니다. 차이콥스키 특유의 애절한 음악성이 드러난 부분으로 작품 전체의 밝은 분위기와 대비되면서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이올린과 고음역 관악기가 맑은 선율을 주고받으면서 꽃잎이 휘날리듯 황홀한 감성을 깨우면 이내 전체 악기가 상행하면서 긴장감을 유발합니다.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무대 장악력이 극대화되는 구간이죠. 이내 금관악기가 단순한 리듬을 반복하면서 왈츠의 성격을 강조하면 하나의 성대한 화음으로 켜켜이 쌓인 전체 악기가 4개의 강렬한 음으로 웅장한 인상을 남기며 작품은 막을 내립니다.
극적인 구성과 세밀한 표현력, 유려하고도 개성이 뚜렷한 선율로 청중으로 하여금 동화 속 환상적인 경험에 휩싸이게 만든다는 불후의 명작 차이콥스키 ‘호두까기 인형’. 130년간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넘치는 애정을 받아온 이 작품이 ‘어른은 어른다워야 한다’는 사회적 억압에 갇힌 수많은 인간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될 수 있길. 이번 크리스마스만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마음껏 터놓을 수 있는 사람들과 어떠한 틀에도 구애받지 않은 채 편안한 하루를 보낼 수 있길. 가장 순수했고 모든 감정에 솔직했으며 자신을 어떠한 형태로도 정의하지 않았던 그때처럼 모든 어른에게 철들지 않는 하루가 용인되는 날이 되길 바랍니다.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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