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종신집권’에 이용당했다는 분노 뒤늦게 폭발

모종혁 중국 통신원 2022. 12. 4.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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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국민들, 10월 당대회에서 시 주석 독재 확인되자 반감 커져
‘中 봉쇄’와 달리 월드컵 등 통해 전달되는 전 세계 자유로운 모습에 충격도

(시사저널=모종혁 중국 통신원)

11월24일 오후 늦게 중국 서쪽 끝에 위치한 신장(新疆)위구르족자치구 우루무치(烏魯木齊)시의 한 고층 아파트에서 화재가 일어났다. 불은 발화된 뒤 아래위층으로 번져 나갔다. 결국 2시간45분 만에 진화됐지만, 10명이 죽고 9명이 부상당했다. 화재는 중국 언론에서는 일반 사건·사고로 다뤄졌다. 그런데 다음 날 오전부터 중국 SNS인 위챗(微信)과 웨이보(微博)에서 화재 당시 찍은 동영상과 사고로 죽은 희생자를 추모하는 포스트가 퍼지기 시작했다. 필자도 우루무치에 거주하는 한 한족 친구가 웨이보에 올린 동영상을 보고 이 소식을 처음 접했다.

또 다른 위구르족 친구는 추모의 글과 사진을 위챗에 올렸다. 동영상을 보면, 불타는 아파트 출입구가 철제 펜스로 봉쇄되어 있었다. 펜스는 지역 당국이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을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막아놓은 것이다. 현재 중국 내 적지 않은 아파트 단지에는 이런 펜스가 설치되어 있다. 심지어 동별 출입구를 쇠사슬 체인으로 잠가놓거나 엘리베이터 운행을 중단한 곳도 허다하다. 이 동영상이 삽시간에 전파되자 우루무치에 사는 한족이건 위구르족이건 크게 분노했다. 인권을 침해하는 봉쇄가 아파트 주민들을 죽였다고 판단한 것이다.

11월28일 중국 베이징에서 우루무치 화재 참사와 가혹한 코로나19 규제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AFP 연합

대규모 시위의 도화선, 우루무치 화재 참사

우루무치 시민들이 이렇게 단정 지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사망자가 모두 유독가스 질식으로 죽은 것이다. 부상자의 화상 피해는 별로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들이 사는 아파트의 봉쇄 상황이 사고를 당한 곳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우루무치가 8월10일 이래 지속적으로 봉쇄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 우루무치의 코로나19 확진자는 두 자릿수로 그리 많지 않았지만, 시 당국은 전역에서 강력한 봉쇄에 들어갔다. 그에 따라 신규 감염자 수는 한 자릿대로 내려갔다. 그러나 시 당국은 봉쇄를 풀지 않았다. 중국 정부의 제로 코로나 정책에 따른 조치였다.

9월 하순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신장 전체에서 확진자가 늘어났다. 신장의 영토는 중국에서 가장 커 한반도의 44배에 달한다. 러시아·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파키스탄·몽골·인도·아프가니스탄 등 8개 국가와 국경이 맞닿아 있다. 신장은 이들 국가와 무역을 하면서 중앙아시아 경제를 주도한다. 또한 풍부한 지하자원을 중국 본토에 공급하는데, 천연가스 매장량은 중국 1위, 석유 매장량은 중국 2위다. 그렇기에 국경을 전부 봉쇄하고 중국 본토와의 교류를 완전히 끊지 않는 한 외부로부터의 코로나19 유입을 막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도 우루무치 봉쇄는 110일 이상 이어졌다. 중국 31개 성, 시, 자치구의 성도(省都) 중 이토록 오랫동안 봉쇄가 이뤄졌던 도시는 우루무치가 처음이다. 외신의 보도에 따르면, 적지 않은 우루무치 주민들은 오랜 봉쇄로 인해 굶주림과 의료 서비스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필자의 한족 친구는 자세한 실상을 말하지는 못한 채 "하루하루 살기 너무 힘들다"고 토로했다. 그런 와중에 화재 참사가 발생한 것이다. 따라서 분노한 우루무치 시민들이 11월25일 저녁에 거리로 뛰쳐나왔다. 수백 명씩 행진하면서 붉은 깃발을 흔들고 "봉쇄를 해제하라"고 외쳤다.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밤늦게 우루무치 시 당국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시 관계자는 "화재 지역이 코로나19 저위험 지역이라 화재 당시 아파트는 봉쇄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또한 "출동한 소방차가 아파트 앞에 주차된 차량 때문에 진입이 어려웠을 뿐 방역을 위해 설치한 펜스 때문에 진화가 지연됐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를 믿는 우루무치 시민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시 당국은 화재 참사에 관한 동영상과 추모 포스트에 대한 검열에 들어갔다. 필자의 우루무치 친구들이 남긴 동영상과 포스트도 삭제됐다.

그러나 우루무치 참사 소식은 이미 대륙 전역으로 퍼진 상태였다. 11월26일 오후부터 28일 새벽까지 중국 주요 도시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확인된 도시만 베이징·상하이·난징·광저우·우한·충칭·청두·란저우 등 동서남북 전역에 고루 분포되어 있었다. 또한 전국 50여 개 대학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이 중 크게 주목을 받은 것은 상하이와 베이징에서의 시위였다. 11월26일 저녁 상하이의 우루무치중루(中路)에서는 100여 명이 모여 촛불을 들고 우루무치 화재 참사로 죽은 이들을 추모했다.

우루무치중루 일대에는 신장자치구 출신 한족과 위구르족이 많이 모여 산다. 그렇기에 그들은 고향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다른 시민들도 합세하면서 숫자가 수백 명으로 늘어났다. 불어난 인파는 "우루무치의 봉쇄를 해제하라" "신장의 봉쇄를 해제하라" "중국의 모든 봉쇄를 해제하라"고 외쳤다. 거리의 다른 한편에도 수백 명의 시민이 나와 있었다. 이들은 더욱 강경한 구호를 외쳤다. "시진핑은 하야하라" "공산당은 물러나라" 등 중국에서는 그 누구도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이었다.

11월27일 중국 상하이의 한 거리에서 시위 도중 시위자가 경찰에 체포되고 있다. ⓒAP 연합

"시진핑 물러나라" 시위대의 주축은 20·30대

다음 날 저녁 베이징의 량마허 거리에 수백 명이 몰려나왔다. 량마허는 외국대사관이 몰려 있는 대사관 거리와 가깝고 유흥가인 싼리툰과 인접해 있다. 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촛불이나 백지를 들고 거리를 행진했다. 검열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아무런 문장도 적지 않은 흰 종이였다. 이는 2020년 홍콩에서 홍콩국가보안법에 반대하는 시위 때 처음 등장했다. 인파가 점차 늘어나자 시민들은 구호를 외쳤다. "우리는 독재를 원치 않는다" "우리는 개인숭배를 원치 않는다" "우리는 종신 지도자를 원치 않는다" 등 모두 시진핑 주석을 겨냥했다.

같은 날 낮 칭화대학에서는 수백 명의 학생이 모여 구호를 외쳤다. "봉쇄는 그만두고 우리에게 자유를 달라" "PCR검사는 그만하고 우리에게 음식을 달라" 등 제로 코로나 정책을 정면으로 비난했다. 칭화대학은 시진핑 주석이 졸업한 모교다. 이렇듯 중국에서 공산당 지배의 종식과 최고지도자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거리시위는 금세기 들어 처음이다. 게다가 시위대의 주축은 20대와 30대 젊은 세대였다. 그렇다면 중국인들은 왜 거리로 몰려나와 저항했을까? 여기에는 최근 중국의 정치·경제·사회적 문제가 복합적으로 도사리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쌓여왔던 시 주석에 대한 반감이 폭발했다. 지난 10월 폐막한 중국공산당 20차 전국대표대회(당대회)에서 시 주석은 총서기직을 3연임했다. 이런 결과는 중국인 대다수가 예상했던 것이다. 문제는 당대회에서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진 탓이었다. 새로 선출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7명 중에는 미래의 지도자감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오직 시 주석의 측근뿐이고 모두 60대 중후반이었다. 덩샤오핑이 세워놓은 '7상8하'(67세는 유임되고 68세부터 퇴임)와 다음 세대의 최고 권력자를 미리 지정하는 '격대지정(隔代指定)' 원칙이 무너졌다.

이는 시 주석이 단순 3연임에만 그치지 않고 종신집권할 수 있다는 신호탄이었다. 사실 9월부터 중국 내에서 시 주석이 종신집권할 수 있다는 우려가 떠돌았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설마설마했다. 그런데 당대회 결과는 이런 우려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예상을 뛰어넘는 시 주석의 권력욕에 중국인들은 마오쩌둥을 떠올렸다. 마오는 사회주의 중국을 건국했지만, 끊임없는 권력욕으로 중국을 나락으로 빠뜨렸다. 1958년부터 추진했던 대약진운동으로 수천만 명을 아사시켰고, 1966년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중국을 퇴보시켰다. 1976년 마오가 죽은 뒤에야 중국은 정상화됐다.

중년층과 노년층은 이런 비극을 직접 경험했다. 젊은 층도 이를 인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베이징에서 "독재 반대"와 "종신 지도자 반대"가 터져나온 것이다. 경제적으로 현재 중국은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있다. 올해 중국 경제성장률은 당국이 목표로 한 5.5%에 훨씬 못 미치는 3.2% 안팎으로 예상되고 있다. 현장에서 느끼는 경기 침체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금세기 들어 중국 경제의 성장을 이끌어왔던 부동산은 주요 개발업체들이 디폴트(채무불이행) 위기에 처해 있다. 그로 인해 제때 아파트에 입주하지 못하는 중국인이 수십만 명에 달한다.

게다가 청년 취업을 창출해 왔던 빅테크(대형 IT기업)는 대규모 감원에 들어갔다. 중국 당국의 과도한 규제 강화 때문이다. 그로 인해 10월 청년 실업률은 17.9%에 달했다. 제로 코로나 정책에 따른 장기 봉쇄로 자영업자의 상황은 더욱 나쁘지만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실제로 빈사 상태에 빠진 적지 않은 자영업자들이 가게나 매장을 내놓고 있지만 거래조차 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는 당국이 밀어붙여 왔던 방역 및 봉쇄 정책의 성공 신화가 급격히 무너지고 있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중국인들은 중국이 전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믿어왔던 게 사실이다.

"마스크 없는 카타르 현실, 중국과 너무 달라"

대다수 국가에서 코로나19 확산 초기에 대응을 제대로 못한 데다, 엄청난 확진자와 사망자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을 위시한 서구의 상황이 심각했다. 하지만 오미크론 바이러스가 대세 유행종이 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오미크론은 전파력이 강했지만, 치사율은 낮았다. 따라서 전 세계 국가들은 앞다투어 팬데믹에서 엔데믹으로 전환했다. 이런 현실과는 반대로 중국 언론은 여전히 코로나19의 위험성만 보도하면서 제로 코로나 정책의 정당성을 강변했다. 문제는 해외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이 SNS를 통해 전하는 바깥소식이었다.

다른 나라의 낮은 치사율 통계를 속속 공개하고 자유로운 외국의 생활상을 사진과 영상으로 전했다. 이에 중국인들은 무언가 잘못됐다고 여겼다. 여기에 월드컵이 중국인들의 답답한 가슴에 불을 질렀다. TV와 온라인으로 24시간 내내 보도되는 카타르의 경기장과 도시 속 모습은 중국과는 완전히 딴 세상이었다. 한 중국인 변호사는 필자에게 "마스크를 낀 관중이 단 한 명도 없는 경기장과 시민들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카타르의 현실이 중국과 너무나 달라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이렇듯 최근 전해지고 있는 정세가 중국인들을 각성시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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