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닥불 닮은 빛" 2030 감성 자극했다…다시 부활한 백열전구 [비크닉]

박영민 입력 2022. 12. 4. 05:00 수정 2022. 12. 4. 06:2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INTRO: 겨울 냄새


얼마 전, '겨울 냄새'가 무엇인지 묻는 글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됐어요. '스키장 냄새'와 '크리스마스 케이크 냄새'부터 '싸늘하면서도 청량한 아침 공기에 따뜻한 탄 내를 조금 섞은 느낌'이라는 공감각적인 설명까지. 글 하나에 달린 십수 개의 기억과 경험이 눈길을 끌었죠.

제가 기억하는 겨울 냄새는 '모닥불 냄새'예요. 추운 겨울 모닥불 앞에 옹기종기 모여 탁탁, 새끼불이 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들숨에 기분이 말랑말랑해지는 바로 그 냄새. 100만년 전부터 동굴 생활을 하면서 모닥불에 익숙해진 덕분일까요. 타는 모닥불을 좋아하는 감성은 우리 DNA에 깊게 새겨진 것 같아요.

사진 일광전구

우리 일상에도 모닥불을 닮은 빛이 있어요. 모닥불을 산업적으로 해석한 백열전구예요. 백열전구의 뿌리는 자연이에요. 130여년 전 백열전구를 발명했을 때 대나무를 탄화해 필라멘트로 사용했고, 2700K의 밝기는 일출 후 두 시간 이내의 청량한 아침 빛의 밝기와 같죠.

사라진 줄만 알았던 백열전구를 아직도 판매하고, 트렌디한 감성의 LED 조명에도 백열전구의 고운 빛깔을 담으려 노력하는 곳이 있어요. 반세기가 넘는 시간 조명 한길을 걸어온 일광전구입니다. 오늘 비크닉에선 모닥불을 닮은 빛을 만드는 국내 유일의 백열전구 제조사, 일광전구의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LED가 조화라면, 백열전구는 생화


대구 성서공단에 위치한 일광전구 본사. 사진 일광전구
"백열전구는 낭만을 만드는 전등입니다. 그 밑에선 사람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거든요. 감성이 필요한 고급 레스토랑과 호텔에서 지금도 백열전구나 초를 비치하는 이유죠. LED와 같은 전자 조명은 결코 흉내를 낼 수 없는 것, 그걸 지켜내고 싶었어요. 빛을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것, 그것이 우리 회사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대구 성서공단에 위치한 일광전구는 1962년 창립 이래 지금까지 백열전구를 생산해온 곳, 올해로 환갑을 맞았어요. 구성원은 총 27명밖에 안 되지만, 300여종이 넘는 전구와 등기구를 직접 생산해 판매하는 알짜 기업이랍니다. 제품뿐 아니라 패키지, 브랜드 로고 등 디자인이 독특하고 감성적이죠.

백열전구 속 필라멘트의 디자인이 독특하고 감성적이다. 사진 일광전구

김홍도 일광전구 대표는 백열전구를 '생화', LED를 '조화'라고 소개했어요. 백열전구는 나무를 태우듯 필라멘트를 태워 빛을 내기 때문에 자연 그 자체를 닮았죠. 조화를 생화처럼 만드는 기술이 아무리 좋아지고 있다고 해도, 향기와 아름다움은 생화를 따라갈 수 없다고요.

사실 백열전구는 전력 효율이 매우 안 좋아 오래전 시장에서 퇴출당한 조명이에요. 전력 사용량 중 5%만 빛을 내는 데 사용하고, 나머지 95%는 뜨거운 열에너지로 방출해요. LED와 비교하면 백열전구의 에너지 효율은 8분의 1 수준, 제품 수명은 25분의 1에 불과하죠. 정부는 이러한 이유로 2014년 가정용 백열전구 생산을 규제했어요.


#디자인 조명 시대를 준비하다


필라멘트를 동그랗게 여러 번 꼬아 제작하기도 한다. 사진 일광전구
"외국처럼 국내에서도 머지않아 인테리어용 부분 조명 시장이 개화할 것이라고 믿었어요. 3~4년 전부터 시장의 방향성이 변화하기 시작했고, 실내 공간에서 조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사람들이 깨닫기 시작했죠."

'번개표' 브랜드로 잘 알려진 금호전기, 남영전구 등 국내 백열전구 제조사들이 모두 LED로 사업을 전환합니다. 단 한 곳, 일광전구만이 백열전구 생산을 멈추지 않았어요. 규제 대상이 아닌 산업·장식용 전구로 바꿔 판매했죠. 어딘가에선 백열전구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란 믿음에서였죠.

사진 일광전구

홀로 남은 시장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단 한가지뿐. '합리적인 가격에 디자인과 품질이 우수한 조명'을 만들기로 결심했죠. 제품의 가짓수를 줄이고 디자인 개발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브랜드 로고부터 제품 디자인까지 소비자 취향에 맞춰 모두 바꿨어요. 해외 유명 브랜드와 겨뤄도 부족함이 없는 제품을 만들어내겠다는 다짐이었어요. 유리구를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깎거나 입으로 불어 만들기도 하고, 필라멘트를 동그랗게 여러 번 꼬아 회오리 촛불 모양을 재현하기도 했죠.

심플하지만 디테일이 살아있는 디자인이 집, 공간 꾸미기에 관심이 많은 젊은 세대의 마음을 사로잡았어요. 2030 소비자들이 즐겨 찾는 더현대 서울에 입점, 글로벌 유수의 브랜드 제품들과 나란히 전시될 수 있었던 이유도 디자인의 힘 덕분이었죠. 매년 2월에 개최되는 국내 최대 디자인 전시회인 '서울 리빙 디자인 페어'에 총 6번 연속으로 출품했고, 제품을 눈여겨본 백화점 매장 측이 입점해달라고 요청했대요. 코로나19 확산으로 내부 공간에 대한 가치가 올라가면서 매출도 상승세를 타고 있어요.


#목표는 글로벌


지난해 열린 서울리빙디자인페어에 일광전구 제품들이 전시된 모습. 사진 일광전구
"백열전구를 판매하는 회사는 앞으로도 일광전구가 유일할 겁니다. 회사가 존속하는 한, 우리는 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백열전구를 계속해 공급할 거예요. 언젠가 촛불을 찾듯, 백열전구를 찾게 돼 있어요."

최근엔 중대한 결정을 내렸어요. 지난달 14일을 끝으로 백열전구 생산을 잠정 중단한 것. 백열전구 제조사가 사라지니 부품 제조사 등 생태계가 완전히 소멸했고, 국내외에서 원자재 조달이 어려워진 탓이에요. 대신, 지난해 출시한 인테리어 조명기구 'IK시리즈'에 백열전구의 감성을 담으려 노력할 계획이에요. 생산은 멈췄지만, 수요에 대응할 수 있는 수준으로 재고가 남아있어서 백열전구 판매도 계속할 예정입니다.

일광전구의 인테리어 조명 '스노우맨'. 사진 일광전구

목표는 한국을 넘어 외국에서 이름을 널리 알려 부가가치가 높은 조명을 수출하는 것. 일광전구는 한때 백열전구 생산량의 80%를 수출했어요. 오랜 시간 백열전구를 만들어왔지만, 인테리어 조명 쪽에선 후발주자인 일광전구,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해외 유수의 디자인상도 여러 차례 받으면서 힘을 기르고 있어요.

김 대표는 "지방의 작은 중소기업이 60년간 한 가지 제품만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시대에 맞게 유연하게 변해왔기 때문이다. 진화하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다"며 "3년 이내에 세계 3대 디자인 쇼에서 상을 받아 브랜드 가치를 높이겠다"고 했어요.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디자인을 개발해 한국을 대표하는 조명 브랜드가 되겠다는 일광전구의 꿈, 이뤄질 수 있을까요?


#뱀발: 아이디어의 아이콘


사진 언스플래시
저효율 조명기기인 백열전구는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사라지고 있지만, 전력 효율이 낮다는 이유만으로 하찮게만 취급할 제품은 아닌 거 같아요. 아직도 사람들의 뇌리엔 아이디어의 상징으로 살아남아 있거든요. 애니메이션과 광고에선 새롭고 참신한 아이디어가 떠오른 순간 주인공의 머리 위 백열전구가 반짝 불이 켜지죠.

19세기 말, 백열전구의 등장으로 비로소 빛을 통제하게 된 당시 상황을 독일의 역사학자 에밀 루트비히는 이렇게 정리했어요.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발견한 이후 인류는 두 번째 불을 발견했다. 인류는 이제 어둠에서 벗어났다"고요. 김 대표에 따르면 130여년 전과 현재 백열전구의 제조 과정은 동일합니다. 에디슨이 만들었던 것과 똑같은 규격의 제품을 옆에서 볼 수 있는 거예요. 한 세기 이상을 견뎌낸 아이디어 상품, 조금은 특별해 보이지 않나요?

박영민 기자 park.yungmin@joongang.co.kr

Copyrightⓒ중앙일보 All Rights Reserved.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