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식의 작별인사
최근 데뷔팀 DRX 떠나 팀 리퀴드 입단
그 역시 울어도 봤고, 웃어도 봤다.
개인방송인 출신인 그는 2019년 겨울 DRX에 입단해 프로게이머 생활을 시작했다. 입단 직후 파격적인 속도로 1군으로 콜업됐다. 그의 커리어는 오르막길로 시작했지만, 1년 만에 요동쳐서 가파른 내리막길로 변했다. 가장 낮은 곳까지 갔다가 다시 세계 최정상에 도달했다. 그는 LCK 꼴찌부터 롤드컵 우승까지 모두 경험했다.
그는 지난달 22일 DRX와의 계약이 만료돼 자유계약(FA) 시장에 나왔다. 정들었던 팀을 떠나게 된 그의 표정엔 아쉬움이 가득해 보였다. 3일 서울의 한 카페에서 ‘표식’ 홍창현을 만났다. 세 가지 표식(롤드컵·DRX·LCS)을 주제로 그와 1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눴다.
#첫 번째 표식: 롤드컵
-4강전부터 DRX를 향한 시선이 달라졌다. 홍 선수도 킨드레드를 꺼내 좋은 경기를 펼쳤다.
“경기 전 밴픽 회의에서 킨드레드를 해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상대 정글러인 ‘피넛’ 한왕호 선수가 잘 아는 구도로 붙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회의 당시에는 코치진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젠지가 자신들이 선호하는 구도에선 참 잘하더라. 첫 세트 직후 진흙탕 밴픽으로 밴픽 노선을 변경하고, 킨드레드를 꺼내기로 했다.”
-킨드레드 대 그레이브즈 구도에서 하이 리스크 플레이를 시도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킨드레드 대 그레이브즈 구도에선 그레이브즈 쪽이 조금 더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게임 후반으로 갈수록 킨드레드 쪽이 더 여유로워지는 것도 맞다. 챔피언 숙련도에 자신이 있었다. 내가 2대2나 3대3 교전에서 최선의 수를 둘 수 있다고 생각해 적극적으로 카운터 정글링같은 줄타기 플레이를 시도했다. 다행히 그 과정에서 큰 사고가 일어나지 않아 잘 성장할 수 있었다.”
-젠지를 이겼을 때, 다음 상대인 T1까지도 잡을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나.
“T1과 스크림을 하면 늘 상대 정글러가 10킬, 20킬씩 기록해서 게임이 펑펑 터졌다. 다른 팀원들의 생각은 모르겠지만, 나와 이재하 코치님은 실전에선 절대 그런 게임이 펼쳐지지 않을 거로 봤다. ‘실전에선 팀원들이 그렇게 많이 죽지 않을 것이다. 분명 우리가 이길 것이다’라고 이 코치님과 얘기를 나눴다.
스크림 피드백 시간에 ‘베릴’ (조)건희 형한테 ‘이 타이밍에 형이 와드를 박아야 한다’고 하면 건희 형은 ‘난 이 타이밍에 상대를 압박해야 해서 절대 못 박는다’고 반박했다. 그래도 막상 실전에선 와드도 잘 박고 상대방한테 갱킹도 안 당해주더라.(웃음) 스크림에선 8분 전에 상대 정글러가 1코어 아이템을 뽑고 오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재하 코치가 미리 헤카림 연습을 주문했다고 들었다.
“결승전 5세트 밴픽을 진행하면서 헤카림이 밴 되지 않기만을 바랐다. 상대 미드와 원딜이 뚜벅이일 때 헤카림만한 챔피언이 없다. 이 코치님이 스프링 시즌부터 맨날 ‘헤카림을 쓸 줄 알아야 한다. 분명 나중에 도움이 될 날이 올 것이다’라고 주문했다. 꼭 솔로 랭크나 스크림에서 꺼내지 않아도 영상 시청을 하며 감을 유지했다. 덕분에 1달 만에 헤카림을 플레이했음에도 불편함이 전혀 없었다.”
-결승전에서 유독 오브젝트 스틸을 많이 당했다. 정신적으로 흔들리진 않았나.
“사실 정글러 간 강타 싸움에선 진 적이 없다. 정확히는 바론 스틸을 당했다. ‘구마유시’ 이민형 선수한테 진 것이다.(웃음) 1세트부터 5세트까지, 여러 번 오브젝트를 뺏겼지만 정신적으로 흔들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마지막 5세트 장로 드래곤 전투에서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하더라. ‘내가 그동안 몇 개의 오브젝트를 스틸 당했더라’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솔직히 그때만큼은 강타 싸움을 피하고 싶었다. 그래도 막판까지 강타 싸움을 요구한 팀원들 덕분에 이겼다.”
-롤드컵 초반엔 기량이 들쑥날쑥했다. 어떻게 슬럼프를 극복했나.
“플레이-인 스테이지에서 RNG를 만났다. 스스로 봤을 때 동선은 괜찮았는데, 플레이의 디테일이 부족했다. 피지컬(메카닉)도 충분히 올라오지 않은 상황이어서 결국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경기 후 감독님께 큰 꾸중을 들었다. 그 이후로 한동안 컨디션이 저점(低點)을 찍었다.
그룹 스테이지 로그전 이후 신동욱 코치님의 연설을 듣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코치님께서 ‘우리가 우승을 하려면 너도, (이)주한이도 모든 챔피언을 잘 다뤄야 한다. 주한이가 잘하는 챔피언은 연습하지 않아도 될 거라는 어설픈 마음가짐으론 절대 우승할 수 없다’고 하시더라.
그 얘기를 듣고는 ‘내가 너무 무뎌졌구나’ 싶었다. 원래는 모든 챔피언을 수준급으로 다룰 자신이 있었는데, 어느새 그 마음가짐이 사라졌었다. 한 번 혼났다고 해서 마음이 꺾여버리는 건 원래의 내가 아니다 싶었다. 바로 정신무장을 다시 했다. 다음날 TES를 잡은 뒤로는 실력이 우상향 그래프를 찍었다.”
-그야말로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슬럼프를 이겨낸 셈이다.
“맞다. 그런데 그룹 스테이지 통과하고는 바로 마음이 꺾여버렸다.(웃음) T1과 스크림을 했는데 승률이 1할정도에 그쳤다. 원래는 팀원들이 정글탓을 하면 ‘네가 와드 박고 사렸어야지’하고 반박했는데 그때는 마음이 꺾여서 ‘미안해…내가 더 잘할게…’하고 바로 수긍했다. 그렇게 마음이 꺾인 채로 일주일을 보냈다. 8강에서 EDG를 극적으로 이기니까 꺾였던 마음이 되살아났다. T1과의 스크림 승률이 1할에서 4할로 올라갔다. 이러나저러나 5할은 절대 안 됐다. 하하.”
-욕설까지 오가는 거친 피드백을 조건희와 주고받고, 또 화해까지 했다고 들었다.
“스크림에서 킨드레드를 골랐다. 3개 라인이 전부 망한 상황에서 내가 해야 할 플레이가 있었다. 나는 ‘내가 더 성장하고 귀환한 뒤 시야를 뚫어도 늦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자 건희 형이 ‘아니다. 미드를 잡았으니 바텀 시야부터 뚫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내가 다시 ‘안 된다. 그렇게 하면 나는 표식으로 지정된 윗바위게를 내줘야 한다. 바텀 시야는 못 뚫는다. 형이 사려야 한다’고 응수했다.
의견 대립을 이어가던 중 건희 형이 감정적으로 나왔다. 나도 순간 화를 참지 못하고 욕설을 뱉었다. 밖으로 나가서 머리를 식혔다. 우린 당장 5시간 뒤에 롤드컵 경기를 치러야 했고, 스크림도 남아 있었다. 팀 분위기를 망쳤다고 생각해 내가 먼저 사과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건희 형도 나를 보더니 ‘내가 잘못했다’고 하더라. 우승했으니 모두 해프닝이다. 우승 못 했으면 평생 안 털어놨을 일화다.(웃음)”
-국내 리그를 치르는 동안엔 오히려 팀원에 대한 피드백을 소극적으로 해서 고민이었다고 들었다.
“LCK 스프링·서머 시즌 동안은 건희 형이 내 플레이를 지적해도 반박할 용기와 지식이 없었다. 그런데 롤드컵쯤 되니 나도 게임에 대한 이해도가 생기더라. 사실 서머 시즌부터 슬슬 건희 형의 지적에 반박하고 대들었다. 롤드컵 때는 정말 크게 다퉜다. 그래도 건희 형과는 여전히 사이가 좋다. 정말 좋아하는 형이다.
이 게임은 팀원끼리 자주 싸워야 잘할 수 있다. LoL은 정답이 여러 개인 게임이다. 팀원끼리 의견을 통일하지 않으면 두 개의 정답이 결과적으로는 둘 다 오답이 돼버리는 경우가 많다. 치열한 의견 조율 과정을 거쳐야 팀으로서 성장하게 된다.”
# 두 번째 표식: DRX
-롤드컵을 우승하자마자 팀이 공중분해 됐다. 홍 선수도 데뷔 후 줄곧 몸담아왔던 팀을 떠났다.
“나와 팀원들은 내년에도 함께하고 싶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모두가 나가면 나 혼자라도 남고 싶었다. 어느덧 팀 로스터가 구색을 갖춰가는 단계에 접어들었지만 여의치 않아 보였다. 팀은 나보다 우선 순위로 둔 정글러가 있었던 것 같다. 결국 나도 다른 팀을 물색했다.
나는 이 팀에서 데뷔했고, 드라마의 1화부터 마지막 화까지 함께했다. 이제 ‘페이커’ 이상혁 선수를 제외하면 한 팀에서만 활약하는 선수가 국내에 없다. 나도 ‘페이커’ 선수처럼 한 팀에서만 쭉 활동하고 싶었다. ‘표식’이란 소환사명 앞에 ‘DRX’가 아닌 다른 국내팀의 이니셜이 붙는 건 감흥이 없다. 그만큼 팀에 대한 애정이 많았고, 남고 싶었다.”
-프랜차이즈 스타에 대한 욕심이 있었나.
“‘페이커’ 선수처럼 프랜차이즈 스타란 이미지를 갖고 싶었다. 팀은 나를 프랜차이즈 스타로 인정을 안 해줄지언정, 팬들은 나를 프랜차이즈 스타로 느낄 수도 있지 않나. 팬들이 나로 인해 DRX를 응원하고, ‘DRX’하면 ‘표식’이란 단어가 떠오르길 바랐다. 한국에서 계속 선수 생활을 할 거라면 그런 선수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되지 않아 너무 아쉽다.”
-한 팀에서 꼴찌도 해보고, 롤드컵 우승도 해봤다.
“인생에서 3년은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그래도 나는 그동안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프로게이머 연습생 생활을 일주일 하고 1군으로 콜업됐다. 꼴찌도, 1등도 해봤다. 내 인생에서 ‘경험치 이벤트’ 기간으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다.”
-‘정글 도는 법을 까먹어버렸다’는 평가를 받았던 2020년을 떠올리면 격세지감이다.
“하하. 당시에는 마음에 큰 상처가 됐던 말이지만 받아들였다. 당시에는 내가 못했던 게 맞다. 조합 이해도도 떨어졌고, 게임을 풀어나가는 방법도 잘 몰랐다. 나는 올해 롤드컵 선발전부터 게임을 보는 눈이 뜨였다. 그런데 재밌는 게, 동선 설계에 자신감이 붙으니까 그동안 스스로 강점으로 여겨왔던 한타와 교전 능력이 떨어지더라. 그러다가 롤드컵 때는 두 능력을 모두 일정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홍 선수에게 DRX란 어떤 의미인가.
“DRX는 나의 고향이다. 프로게이머 ‘표식’이 태어나고, 자라고, 좋은 성과까지 거둔 곳이다. 이제 고향을 떠났으니 앞으로는 다른 곳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다. 내년에 리퀴드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다면 이곳에서 종신할 수도 있지 않겠나.(웃음) 나는 고향을 떠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2022년 DRX 멤버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괜찮다. 팀원들끼리 여전히 끈끈한 관계를 유지 중이다.”
-DRX에서의 3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꼽는다면.
“2021년 스프링 시즌, POG 포인트 1000점을 돌파했을 때다. 스토브리그에 팀원들이 모두 떠난 뒤 팬분들에게 큰절을 올렸다. 힘들게 맞이한 시즌이었는데 팀원들도, 나도 잘한 덕분에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뒀다. DRX에서 치른 6번의 LCK 시즌 중 가장 만족스러웠다.”
-지난 3년 동안의 여정에서 가장 고마운 사람을 꼽는다면.
“이재하 코치님이다. 정글러로서의 뇌지컬(두뇌 플레이)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줬다. 이 코치님께 배워보니 내가 지난 2년 동안 정글러로서 지식이 정말 부족했구나 싶더라. ‘녹턴은 바론 체력이 3000 남았을 때 궁극기를 사용하면 스틸을 예방할 수 있다’같은 자잘한 팁부터 시작해 콜과 동선 설계, 조합 이해도까지 도움을 받았다.
그 다음으로는 ‘데프트’ (김)혁규 형을 꼽고 싶다. 2021시즌을 꼴찌로 끝낸 뒤 나는 자존감이 정말 크게 떨어져 있었다. ‘뇌가 타버렸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이기는 방법도 기억해내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런데 혁규 형이 ‘너를 믿는다. 너 잘하는 정글러다’라며 DRX로 오겠다고 하더라. 나는 ‘나 정말 못한다. 오면 형이 힘들 수도 있다’며 오지 말라고 거듭 만류했다. 혁규 형한테 미안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혁규 형은 결국 이 팀으로 왔고, 나를 끝까지 신뢰해줬다. 이번 스토브리그에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고마웠다.”
# 세 번째 표식: LCS
-왜 팀 리퀴드를 차기 행선지로 정했나.
“LPL 쪽도 고려했지만 환경이 좋지 않았다. 내가 중국어 의사소통이 전혀 안 되는 상황인데, 충분한 준비 없이 가면 한국인 팀원이 없어 적응이 어려울 것 같았다. 팀원들의 경쟁력, 적응 환경 등을 고려하면 팀 리퀴드가 가장 좋은 선택지로 보였다. 한국인 동료들이 많아 적응하기 쉬울 것 같았다.”
-롤드컵 우승자 출신인 장경환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다. 까다로운 피드백에 대한 염려는 없나.
“김대호 감독님과 건희 형으로 단련된 멘탈이다. 나는 이미 꺾이지 않는 마음을 장착했다.”
-롤드컵을 치르면서 LCS 팀들과 스크림으로 맞붙어봤다. 어떤 인상을 받았나.
“습득력이 빠르단 인상을 받았다. 이번 롤드컵을 치르는 동안 EG와 스크림을 자주 했다. 처음에는 우리가 10연승 정도를 기록했다. 큰 위협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우리한테 당했던 걸 다 흡수해오더라. 나중에는 연습에 큰 도움이 될 정도로 성장했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더 잘할 수 있는 리그고 선수들이다. 리퀴드가 LCS의 연습 문화를 선도하는 팀이 됐으면 한다. 우리가 압도적 강팀으로 부상한다면 나머지 9개 팀도 따라올 것으로 기대한다.”
-LCS와 리퀴드에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한국에서 못 이뤘던 꿈들, 가령 리그 우승 같은 것들을 새로운 팀에서 이뤄보고 싶다. 팀원들을 리퀴드란 팀을 상징하는 선수로 만들어주고 싶다. 우리 딜러 라인이 아직 1군 리그 경험이 없다. 시즌을 치르다 보면 주눅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과 반드시 마주하게 된다. 그들이 꺾이지 않는 마음을 장착할 수 있게 돕겠다.”
-마지막으로, 2021 LCK 서머 시즌을 꼴찌로 마쳤던 홍창현에게 한 마디를 남긴다면.
“스스로를 의심하지 마라. 너는 잘할 수 있다. 당장은 커리어가 잘 풀리지 않아 많이 힘들겠지만, 넌 잘할 수 있는 선수다. 넌 일단 피지컬이 나쁘지 않다. 넌 반응속도가 무려 138이다.(웃음)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길 바란다.”
윤민섭 기자 flam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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