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왜 매트 위의 ‘언니님’은 없을까

한겨레 2022. 12. 3.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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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하루운동]#오늘하루운동 주짓수
입문자 벗어나 블루벨트 되자
적자생존의 매트에서 길 잃어
성장하려 ‘구애’를 시작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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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소설가 아멜리 노통브는 일본의 대기업에서 인턴 직원으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 소설의 제목은 <두려움과 떨림>이다. ‘왕을 알현할 때 두려움과 떨림을 느껴야 한다’는 황실의 규정에서 따왔고 서열과 그에 따른 복종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을 보면 어떤 작가도 위계와 서열을 노통브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미스터 하네다는 미스터 오모치의 상사였고 미스터 오모치는 미스터 사이토의, 미스터 사이토는 미스 모리의, 미스 모리는 나의 상사였다. 그런데 나는, 나는 누구의 상사도 아니었다.”

이 문장을 주짓수에도 응용할 수 있다. 먹이피라미드의 정점에 블랙 벨트가 있고 블랙 아래에 브라운, 브라운 아래에 퍼플, 퍼플 아래에 초급자인 블루, 블루 아래에는 입문자인 화이트 벨트가 피라미드의 최하층을 떠받친다.

‘민영 형님’으로 불리고 싶을 줄이야

그렇다면 나는? 나는 블루 벨트에 속하나 철저하게 주변인이다. 내가 주변인이라는 가장 명확한 증거는 바로 주짓수를 소재로 글을 쓰는 데 있다. 글 쓰는 사람은 숙명적으로 주변인이자 관찰자일 수밖에 없다. 내부자들은 주짓수에 몰두하기도 바빠서 글 따위 쓰지 않는다. 오직 의심하고 회의하고 절망하는 이들만이 글을 쓴다.

내가 주변인이 된 원인 가운데 성별 또한 빠질 수 없다. 주짓수 도장은 체육관이라는 공간이 으레 그렇듯, ‘형님 문화’를 기반으로 운용된다. 그러니까 형도 아니고 ‘형님’이다. 가끔 누가 ‘형님!’하고 육성으로 내뱉으면 나도 모르게 키득거렸다(이러니까 소외되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어쩌랴, 이보다 웃기는 단어도 없는데.

애초에 선생님, 선배님보다 더 사적이고 친근한 연장자라면 ‘형’이라고 불러야겠지만 어쩐지 민망하다. 그래서 어색하게 ‘-님’을 붙이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형님’하고 불러도 ‘아우님’하는 대답은 없고 일방적인 깍뜻함만 남는다.

그러나 형님이라는 호칭을 비웃을 때는 몰랐다. 차라리 ‘민영 형님’으로 불리고 싶어질 줄은. 아마도 블루 벨트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벨트 색만큼이나 우울했던 시기였으리라. 그 무렵에 특히 우울했던 건 피라미드의 실질적인 최하층이 블루라는 걸 뒤늦게 깨달아서였다.

알고 보니 지루했던 화이트 벨트가 되레 호시절이었다. 어느 집단이나 입문자에게는 친절하기 마련이다. 유인원이나 원시 부족도 갓난아이는 정성껏 돌보지 않는가. 화이트 벨트는 모두의 배려와 보호 속에서 걸음마를 떼고 블루로 성장한다.

문제는 블루 벨트를 받은 다음이었다. 보호와 배려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살아남아서 중간 계급인 퍼플이 될 것인가, 아니면 주짓수를 한때 즐겼던 취미로 추억할 것인가 이 시기에 결정해야 한다. 이런 간단한 사실조차 몰랐던 나는 적자생존의 매트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가만히 보니 남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블루 벨트를 받았어도 그들은 나처럼 우울해하지 않았다. 대신 각자 살길을 찾아서 뒤도 보지 않고 달려갔다. 그들의 생존법은 ‘믿고 의지할 상급자를 찾아서 구애를 시도하고 성공하기’였다.

남자들은 용케도 누군가를 찾는다. 몸소 터득한 노하우를 전수해주고 그러면서 자신을 성장시켜줄 또 다른 남자를. 그는 도장에 채용돼서 수업을 담당하는 지도자와는 다른 존재다. 훨씬 더 사적이고 친밀하며 정신적이기까지 하다. 한마디로 ‘매트의 형님’인 셈이다.

상위 포식자를 향한 남자들의 치열하고 열렬한 구애는 주짓수 도장뿐만 아니라 테니스장, 당구장, 기원 등 남자들이 죽치는 여가의 장에서 항상 벌어지는 일이다. 구애에 성공한 피식자와 구애를 받아준 포식자의 주변에는 이상한 사랑이 넘실거린다.

그렇다면 나도 구애할 대상을 찾으면 될 일이었다. 여성 포식자가 많지 않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어렵게 만난 포식자와 마주하자 두려움과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지만 긴장할 것 없다. 그토록 원하던 ‘누군가’를 찾았으니, 이제 준비한 의식만 치르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나의 구애는 시작도 전에 완전히 실패했다.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소개하는 동안 포식자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 아름답고 두려운 포식자는 여성 집단이나 연대에는 하등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나에게 ‘한국식으로 변질한 페미니즘’이 싫다고 했고 ‘주짓떼라’(jiujitera, 주짓수를 수련하는 여성)들이 늘어남에 따라서 남자들이 겪는 고충’에 관해서 한참이나 설교했다. 그렇게 구애 의식은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나는 모든 희망과 기대를 접고 돌아섰다.

그날은 한없이 쓸쓸했다. 다음 날에는 슬픔이 밀려왔다. 이 슬픔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왜 여성은 다른 여성을 통해서 성장할 수 없는가? ‘언니님’을 모시게 될지언정 일단 구애에 성공하고 싶었다. 하나의 관계를 작은 집단으로 키우면 여성이 소외되지 않는 매트도 허황된 꿈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소박한 꿈은 첫 단추를 끼우기조차 쉽지 않았다. 내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여성들끼리는 근본적으로 온도가 낮다. 엄밀히 말하면 서로 사랑하지 않고 그렇다고 싸울 정도로 미워하지도 않는다. 여성 집단 내에는 언제나 조금은 냉랭한 온도와 데면데면한 거리감이 존재한다.

주짓수를 버릴 수 없었던 그의 선택

우리는 공감의 천재라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는 고충에 관해서는 폭발적인 반응을 유도할 수 있다. 눈물, 위로, 연민이 솟구친다. 그러나 실질적인 변화를 위한 행동에 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갑자기 열기가 식고 머쓱해진다. 여성 집단의 열등함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보다 소수자 집단의 숙명에 관해 말하고 싶다. 무엇보다 나에게는 어떤 지향점이나 본보기가 없다. 이대로 가면 뭐가 되는 걸까? 아마도 ‘주짓수를 오래 배운 여성’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후 블루 벨트로 일 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고 나서, 구애를 거절한 포식자를 다른 의미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주짓수를 버릴 수 없어서 남성을 지향하고 본보기로 삼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자 다시 쓸쓸함이 밀려왔다. 그가 겪었을 좌절과 한계를 가늠하기만 해도 고독했다.

글·사진 양민영 <운동하는 여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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