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 클릭하기] 포르노 없는 포르노 사회

홍성일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2022. 12. 3.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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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오늘 홍성일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몇 년 전, 한국의 '먹방'이 화제가 되면서 몇몇 해외 언론은 푸드 포르노를 소환하였다. BBC의 <저녁 식사를 방송하는 한국인들(The Koreans who televise themselves eating dinner)>(2015)은 수 천 명의 시청자 앞에서 단지 먹는 것만으로 돈을 버는 한국의 인터넷 방송을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이는 일종의 “관음증 혹은 푸드 포르노”인지 묻는다. CNN의 <한국의 온라인 트렌드: 아름다운 여성의 식사를 지켜보기(South Korea's online trend: Playing to watch a pretty girl eat)>(2014) 또한 폭식 '먹방'을 “가학적 푸드 포르노”에 견주었다.

두 기사 모두 결론부에서는 1인가구의 증가, 외로움의 확산, 별풍선 등의 디지털 금전수익 모델 및 실시간 온라인 소통같은 한국 특유의 사회, 문화, 기술적 요소로 이야기를 확장하며 새로운 인터넷 문화의 미래를 말한다. 일견 '먹방'은 포르노에 비교될 정도로 기괴하고 노골적이지만 나름의 한국적 맥락이 자리한다는 이야기겠다.

▲ 사진=gettyimagesbank

해당 기사를 접했을 때 '푸드 포르노'란 말에 충격을 받았다. 포르노가 신체의 외설적 전시와 이를 통한 잉여 향락의 추구라면 시끄럽게 쩝쩝대며 신체 기관 안으로 분주히 음식을 밀어 넣는 '먹방'은 포르노와 외형적으로 닮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유사성에만 관심이 갔던 것은 아니다.

문화비평가 존 버거는 그의 저서 <다른 방식으로 보기>에서 서구 회화를 분석하며, “'벌거벗은 몸'은 있는 그대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지만, '누드'는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특별한 목적에서 전시되는 것”이라 말한다. 자연적인 인체를 모사했다는 누드화가 실은 화가, 후원자, 최종적으로 그림의 소유자 및 감상자를 위해 특별한 목적으로 가공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보기와 달리, “누드는 의복의 한 형식”이었던 셈이다.

포르노도 마찬가지다. 포르노가 보여주는 것은 외설적 섹스만이 아니다. 포르노의 직접성, 즉자성, 자극성은 특정한 유형의 섹슈얼리티를 은폐한다. 예컨대 포르노는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능하고픈 남성의 욕망을 구현한다. 포르노 속에서 남성은 쾌락의 지배자이고, 종착지이며, 파트너에게 완벽한 오르가슴을 제공하는 초인이다. 친밀함과 돌봄에 무감하고 오로지 사정에 주력하는 목적지향성은 언제나 성과 달성을 요구받는 현대 남성성의 굴절된 모습이다.

특정 현상을 '포르노'에 비유하는 일은 그러므로 압도적인 가시성의 폭력과 그 이면에 자리한 매개 논리를 폭로하는 것이다. 문화 비평가 수잔 손탁이 <사진에 관하여>에서 사진 찍는 행위를 “유사 강간(a semblance of rape)”으로 칭한 이유도 이와 같았다. 무심하게 현상을 담는 행위처럼 보이지만 사진 찍기는 세계를 소유하고픈 사진사의 욕망을 반영하며, “사진으로 찍어놓아야 할 만큼 그 피사체를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그 무엇인가(예컨대 남에게는 고통이나 불행이더라도 내게는 흥미로움을 주는 상황)와 공모하는 행위”이다. 그러니 김건희 여사가 캄보디아 봉사 활동에서 찍은 그 사진이 '빈곤 포르노'라는 비판에 직면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의도와 별개로, 사진 속 봉사의 구체성과 관계없이, 비참의 세계를 소유하려는 카메라가 그곳에 자리했으며 수많은 사진 중 그 사진을 세심하게 선별한 과정 자체가 피사체를 흥미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 11월12일 김건희 여사가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심장병을 앓고 있는 아동의 가정을 방문한 모습을 담은 사진들. 사진=대통령실

일각에서는 이러한 포르노의 비유를 불편해하는 모양새다. 한국 사회에서 공식적으로는 포르노가 부재한 탓에 포르노라는 명명 자체가 불쾌하게 들렸던 것 같다. 그런데 이조차도 포르노적이다. 포르노가 없다는 명백성으로 실제 한국 사회가 포르노처럼 굴러간다는 것을 보지 못하니 말이다.

따져보면 포르노를 특징짓는 직접성, 즉자성, 자극성이 한국 사회의 품행 원리가 된지 이미 오래이다. 각자도생하고 남보다 더 큰 목소리를 내기 위해 소리 높이며 더 큰 차, 더 우람한 집, 더 많은 돈을 위해 질주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텔레비전을 지배하는 리얼리티 예능, 정치인의 정제되지 않은 언사, 이주 노동자, 여성, 지역, 성소수자 등에 대한 각종 혐오 발화 속에서 한국은 이미 외설적인 포르노 사회였다. 다만 옷을 차려 입고 그 짓을 하고 있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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