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호박전 노랗게 지져 김치 걸쳐 먹는 겨울의 맛

한겨레 입력 2022. 12. 3. 11:05 수정 2022. 12. 3.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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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 홍신애의 이달의 식재료]홍신애의 이달의 식재료 늙은 호박
고소한 씨는 잘 골라 구워 먹고
속은 입에 착 붙는 죽·떡으로…
껍질 빼고 버릴 게 없는 한 덩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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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에 덩그러니 노란 호박이 덩굴째 올라타 앉아 있다. 무거워 보인다. 저거 지붕 괜찮나 싶다가도 이내 달고 끈끈한 늙은 호박의 맛이 떠올라 입맛을 먼저 다시게 된다. 어릴 적 차로 시골길을 달리다 보면 기와나 초가지붕 위에 올라탄 크고 작은 호박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저 호박은 신데렐라가 파티 갈 때 타고 갔던 그 호박 마차가 되는 건가?” 어린 시절 공주병(?)을 앓던 나는 호박만 보면 쓸데없는 생각도 자주 했다. 그래서 노랗고 잘 익은 큰 호박을 마주치면 남들 몰래 작은 목소리로 주문을 외워보기도 했었다.

요즘은 지붕 위의 호박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늙은 호박이라면 핼러윈 장식용으로 큰 마트의 한구석에 곱게 쌓여있는 걸 가끔 보는 게 전부다. 자르고 손질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외면받고, 또 자그마한 단호박에 비하면 덜 달고 수분이 많은 탓에 요리에 응용하기도 어려워서 늙은 호박은 인기가 없다. ‘늙은’이란 수식어도 왠지 마음에 걸린다. 그렇다면 새로운 이름이라도 지어줘야 하는 걸까.

애호박이 결국 늙은 호박이 된다. 여름 동안 초록색 멍울이 맺히고 주먹만 한 덩어리가 되었을 때 따서 먹으면 속이 달고 겉이 파란 애호박이다. 시중에 유통되는 건 이걸 비닐을 씌워 길쭉한 모양을 잡아 키운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애호박이 날 때부터 날씬하고 기다랗게 생긴 줄 알지만 우리가 흔히 보는 초록색 둥근 호박도 모두 애호박이다. 여름을 나고 이 애호박이 자라면 겉껍질이 노랗고 단단한 늙은 호박이 된다.

늙은 호박은 껍질째 달여 만들면 부종을 빼는 데 특효약이라고 해서 출산한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다. 아마 시중에 유통되는 늙은 호박의 대부분은 이렇게 약재용으로 사용되는 것 같다. 씨는 잘 골라 씻어 두 번 구워내면 껍질 까고 먹는 속살의 맛이 달고 고소하다. 늙은 호박의 살은 생각보다 단단한데 수분이 많아서 죽을 끓여내기 좋다. 각종 콩, 팥에 수수나 차조 등을 쌀과 함께 무르도록 푹 끓여낸 뒤 소금 한 숟가락만 넣으면 달고 입에 착 붙는 호박죽이 된다. 곡물의 양을 좀 더 늘리고 견과류를 첨가하면 호박범벅이라고 부르는 달콤한 간식이 된다.

늙은 호박은 뭐니뭐니해도 부침개를 부쳐 먹는 게 진짜 꿀맛이다. 껍질을 벗기고 씨를 제거한 뒤 살을 굵게 채 썬다. 여기에 소금을 한 숟가락 뿌리고 잘 뒤적여 잠시 두면 수분이 촉촉하게 생긴다. 거기에 밀가루를 넣고 버무리듯이 무쳐낸 것을 넉넉한 기름에 튀겨내듯 지진다. 투명하면서도 노랗게 익은 늙은 호박 부침개를 심플한 초간장에 콕 찍어 뜨거울 때 호호 불면서 먹는다. 여기에 갓 담근 김장김치를 시원하게 쭉 찢어서 한 입 같이 곁들이면 이게 바로 12월의 맛이다.

조금 생소한 요리지만 물호박떡이란 것도 있다. 햅쌀을 잘 빻아 만든 멥쌀가루에다 나박하게 썬 늙은 호박을 솔솔 무쳐서 찜기에 쪄내면 간단히 완성할 수 있다. 멥쌀가루로만 만드는 백설기에 비하면 농익은 호박 맛이 진하게 배어 나와 색다른 매력을 선사한다. 갓 쪄내 김이 솔솔 나는 물호박떡은 겨울 동치미와도 찰떡궁합이다. 달큰하면서 진득한 떡 한입에 시원한 사이다 같은 동치미 국물 한 숟가락은 계속 먹어도 질리지 않는 마법의 조화를 만든다. 개인적으로는 물호박떡을 만들 때 울타리콩을 삶아 설탕에 슬쩍 버무렸다가 같이 넣고 찌기도 하는데 이렇게 콩이 들어가면 단백질까지 보충되어 한 끼 식사로도 그만이다.

생각해보면 억울한 일이다. 늙은 호박은 늙는다는 말이 무색하게도 실제 나이는 한 살에 불과하다. 당연하지 않은가. 늙은 호박은 여름의 애호박과는 또 다른 풍미와 맛을 갖고 있다. 약재로 사용될 정도로 쓰임도 다양하다. 홀대받기엔 너무 귀한 맛. 겨우내 옆에 두고 야금야금 전으로 죽으로 또 떡으로 만들어 먹어보자. 호박이 마차로 변해서 먹지 못하게 되기 전에.

홍신애 요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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