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기가 없는 형벌, 내자 곁으로 가는 날까지 못 면하는 囚人"

2022. 12. 3. 10:2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프레시안books] 풍시조집 <정은 죽었다> 94권 펴낸 박진환 노시인의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이계홍 전 언론인·소설가]
아내의 죽음은 자신을 형벌하는 고통

필순의 노시인이 오랜 지병 끝에 타계한 아내에게 바치는 애절한 헌시가 있다. ‘풍시조’의 개척자로 널리 알려진 박진환(86) 시인의 이야기다.

박 시인의 아내에게 바치는 헌시는 지고지순한 사랑의 이야기가 아니라 아내를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했던 지난 60년의 부부생활을 고백한 통징(痛懲)의 언어다. 긴 세월 함께 살아오면서 치열한 삶에 부대끼다가 끝내는 가혹한 투병생활로 기진맥진해진 아내의 모습을 지켜본 연민과 회한의 고백이다. ‘통징’은 시인의 표현을 빌자면, “엄하게 자신을 형벌하는 고통”이다.

항암중인 아내는 마약급 진통제 투여에도 가슴이 빠개지고
등이 무너질 것같다는 고통을 호소한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고작 지압도, 안마도 아닌 급소 주물러 풀어주기, 내 위안을 위한
-‘정은 죽었다’ 58권 ‘내 위안을 위한’ 전문

박 시인은 지난 5월 초 부인 장경자(82) 여사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냈다. 부인의 타계 이후 엄청난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져 그 스스로 무너질 것 같았지만, 그동안 그날그날 세상에서 일어난 일들을 일기체 형식으로 썼던 3행시 형식의 ‘풍시조’ 작품을 하나로 묶어 지난달 94권의 시집 ‘정은 죽었다’(조선문학 간행)를 펴냈다. 이것으로 아내에 대한 사랑을 재확인하며 이승에서 떠나보내고, 새로운 생의 근거를 충전했다.

아내를 그린 시편을 중심으로 박 시인의 사연을 좀더 깊이 들어가본다.

“나는 젊은 시절, 현대경제, 대한일보, 한국일보, 중앙일보 기자로 근무했습니다. 아내는 그의 고향인 전남 강진 병영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그는 나의 목포사범학교 3년 후배였습니다.”

아내 장경자 여사는 사범학교 재학시절 문학동인회 활동을 하던 문학도였다. 박 시인 역시 목포사범학교를 나온 뒤 문학에 뜻을 두어 동국대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신문사 기자 생활을 하면서 장 여사를 만났다. 1962년 무렵이다.

▲박진환 시인 ⓒ이계홍

사과상자에 신문지 깔아놓고 밥을 차려먹던 시절

“당시 신문기자 시절은 월급이랄 것이 없었어요. 경리과에서 월급을 봉투에 10원짜리까지 챙겨서 담아주던 시절이었는데, 사흘이 못가서 바닥이 났지요. 모두 지사적 풍모를 지니고, 월급에 연연하지 않고 호방하게 살았기 때문이죠. 아내가 타계한 후 아이들이 엄마의 옛 일기를 살피면서 한 구절을 보여주더군요. 서울 올라와 신혼살림을 차렸는데, 단칸짜리 셋방에서 사과상자에 신문지를 깔아놓고 밥을 차려먹었다는 구절이 나왔어요.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그런 아내가 타계한 후 자신이 꼭 죄인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난을 남루처럼 달고 다니던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억척스럽게 살아오고, 자신이 못다 이룬 문학의 꿈을 남편 뒷바라지로 대신하고, 2남 1녀의 자녀를 무난히 키운 아내가 생의 안락을 누리지 못하고 오랜 병상생활 끝에 타계했기 때문이다.

“아내는 뇌경색으로 10년 넘게 고생했습니다. 그후 간과 쓸개 쪽의 암으로 고생을 하다 어찌어찌 완치됐나 했는데 5년 후 주변으로 전이되어 긴 투병생활만 하다 갔지요. 간병한다고 했지만, 부족하기만 했습니다.”

아내가 퇴원을 했다. 완치가 아닌 그 반대의 퇴원
반가움으로 슬픔으로 맞이할 수 없는 퇴원
할 수 있는 말은 미안하오 고맙소 뿐
-‘정은 죽었다’ 75권 ‘뿐’ 전문

밤새 끙끙대는 신음소리 자장가 삼아 잠이 들면 흉몽
흉몽에 놀라 깼다 하면 불면으로 새벽 맞기 마련
아픔 없이 사는 것이 행복이란 걸 내자의 투병에서 배운다
-‘정은 죽었다’ 58권 ‘투병에서 배운다’ 전문

박 시인은 시집 ‘정은 죽었다’의 책머리에 “내자가 병석에 누워 있어서 시를 써놓고도 시집으로 엮지 못했다. 시집보다 긴요한 일이 간병이었기 때문이다. 내자는 지난해를 간신히 넘기고 올해 5월 초 소천했다. 간병 틈틈이 부지런을 떤 덕분인지 풍시조 9000여편을 얻었다. 이를 100편씩 94권의 시집에 나누어 묶었다”고 소개했다. 본래는 100권을 목표로 했지만, 이 정도로도 일단 마무리하겠다고 스스로를 격려하며 시집으로 묶었다.

순수 자비 출판이지만, 이 비용은 아내의 지갑에서 얻어진 결실이다. 아내에게 바치는 헌시의 뜻을 담았으나 부제(副題)로 붙이지 않았다. 아내에 대한 애틋한 시편이 헌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쇄소가 그의 이런 충정을 살펴 실비로 책을 내주었다.

정신으로 대표되는 精, 바름으로 대표되는 正, 애절한 사랑으로 표출되는 情...

시집 ‘정은 죽었다’는 권당 150 페이지로 94권 분량이다. 시집에 ‘정’이라는 타이틀을 붙인 것은 ‘정’의 복합적인 함의 때문이다. 박 시인은 “‘정’을 “정신으로 대표되는 정(精)과, 바름으로 대표되는 정(正), 정치로 대표되는 정(政), 개인의 애절한 사랑과 공동체 사랑의 감정으로 표출되는 정(情), 그리고 고요하고 평화스러움으로 표현되는 정(淨)이 포괄된다”고 설명했다. 이중 아내에 대한 헌시는 부부로서 개인적 사랑이 담긴 정(情)에 해당된다.

시집 ‘정은 죽었다’에는 20년동안 우리의 시조와 같이 3행시 형식으로 하되 시조의 율조나 자수율(字數律))에 연연하지 않은 자유시 성격의 ‘풍시조’에 박 시인 자신의 사유체계와 세상을 보는 눈이 담겨 있다. 자유스런 3행시를 통해 정치의 세계를 꼬집고, 끝없는 대결상을 비판하고, 가치와 미래 지향이 아니라 현실의 탐욕과 이익 우선의 사회를 나무라고 있다. 컨시트의 특성인 세태에 대한 비아냥, 조소를 통해 문화적 복수를 감행함으로써 카타르시스를 꾀한다는 시도다. 일종의 칼럼시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정은 죽었다’ 94권에 일관하는 그의 시정신은 이같이 사회적 풍자시로 점철되지만, 먼저 떠난 아내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담은 시들이 각 권마다 있다. 달콤하고 아기자기한 것이 아니라 결혼한 이후 결혼기념품 하나 제대로 사주지 못한 시인의 무능을 대신해 아내가 고생했던 회한이 담겨있는 시편들이다. 이 시집으로 아내의 헌신과 배려를 보상하겠다는 뜻도 담겨있다. 기법에 기대지 않고 슬픔이 나온대로 감정에 충실했다.

무능한 남편 바라보면서, 아니 죽어가면서 내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남편이 뭘로 보였을까
살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을까? ???에 답하지 못한 채 보냈으니
-‘정은 죽었다’ 92권 ‘보냈으니’ 중에서

고인은 투병 중에도 빠짐없이 집안일을 챙겼다. 집안 일 챙긴 것은 약 60권의 가계부가 말해주고 있다. 깨알같이 쓴 가계부는 60년동안 내핍과 절약이 기본 주제가 되어 정리돼있다. 쌀값, 무 한단, 배추 몇포기, 학용품 값 등 서민 삶의 단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생할경제 그대로의 내용이 빼곡이 들어차 있다. 일본에선 80년 가까이 가계부를 쓴 96세의 가게 주인의 가계부가 일본 경제지에 연재된 적이 있는데 이에 견줄만한 가계부다. 아내 사후 들여다본 가계부가 얼마나 실존을 위한 투쟁을 벌였나를 보고 박 시인은 가슴이 절절했다.

그런 아내도 젊은 시절 시인을 꿈꿨다. 박남수 시인을 사사해 문학지에 추천을 받았다.

“결혼 전 박남수 시인의 추천으로 내자의 시가 추천되었지요. 필명 장송란으로 시를 썼는데, 결혼하여 남편이 시를 쓰고 있으니 자기는 접겠다고 했어요. 한 집에 북 치고 장구 치는 일이 될 뿐만 아니라 함께 시를 쓰고 나서면 굶어죽기 십상이라면서 일을 찾아 나섰어요. 불광동에 가구점을 차리기도 했습니다.”

고인은 상경하자마자 ‘생활의 전사’로 활동했는데 가구점 외에도 십자 못을 찍어내는 환경 열악한 공장도 운영했다.

▲<정은 죽었다> 박진환 ⓒ조선문학사

아내의 죽음을 보는 고통은 수인(囚人) 그 자체

문학도 출신답게 고인은 시를 쓰는 남편을 깍듯이 우러르며 시쓰기에 몰두하도록 지원했다. 그리고 자녀들을 출가시키고,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을 때즘 병석에 누웠다. 이 과정을 지켜본 박 시인은 ‘고분지통탄’이라고 말했다.

“‘고분지통탄’은 장자의 ‘고분지통’에 레토릭을 강화한 것입니다. 아내가 죽은 슬픔을 비유하여 쓰는 말로 장자는 고분지통(叩盆之痛)이라고 했지요. 여기에 내가 탄식의 탄(嘆)을 하나 더 추가해 ‘고분지통탄’으로 얘기한 것이죠. 아내의 죽음을 보는 고통은 수인(囚人) 그 자체입니다.”

형기가 없는 형벌, 내자 곁으로 가는 날까지 못 면하는 수인(囚人)
죄명은 아내 먼저 보낸 죄, 보내지 않은 자는 모른다
죄값의 혹독함을, 수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비애를
-‘정은 죽었다’ 92권 ‘비애를’ 전문

아내에게 전적으로 경제력을 의지하고 자신은 시맥을 찾아 나선 것이 고마운 한편으로 쓰라림으로 남는다. 박 시인은 아내에 의존해 대학원(중앙대)을 마치고, 한서대 교수와 동 대학 예술대학원장을 지냈다. 모두가 아내의 뒷바라지로 가능했던 일이다.
왜 이리 후회 뿐일까, 잘못한 것보다 잘한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왜 이리 미안하고 아픈 것일까, 과연 최선을 다했던 것일까?
왜 이리 못난 생각 뿐일까?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부질없는 생각이라니
-‘정은 죽었다’ 92권 ‘부질없는 생각이라니’ 중에서

404권의 시집으로 가장 많은 시집 낸 기록...기록은 계속된다

박 시인은 ‘정은 죽었다’ 94권을 포함해 그간 출간한 시집이 404권이 된다. 이 시집을 박진환시전집 60권으로 최근 묶어냈다. 다작으로 보면 고 조병화 시인을 거론하는데, 박 시인은 조병화 시인보다 양적인 면에서 압도한다. 그의 다작의 비결은 매일 매일 세상에서 일어난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지켜보며 일기 쓰듯 3행시의 풍시조로 시를 담아냈기 때문. 높은 예술성보다 인생의 본질에 대한 문제에서부터 정치 세태를 쉬운 일상의 언어로 표현했다.

“시집 ‘정은 죽었다’를 내면서 시인의 한 세기를 정리한 것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나섰습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부지런히 쓸 것이고, 그래서 부끄러움이 없는 시인이 되고 싶습니다. 쓰기의 기록은 계속될 것입니다.”

86세의 나이에 연연하지 않는 박 시인의 모습이 오히려 시적 긴장과 새로운 생의 활력을 불어넣어주고 있다. 팔순의 나이를 ‘인생의 은퇴기’나 ‘인생의 방전 시기’로 보는 것이 아니라 계속 ‘충전의 시기’로 힘을 모아가고 있는 것이다.

한편 박 시인은 전남 해남 출신으로 196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시로, ‘자유문학’에 평론으로 문단 등단했다. 이후 『신년대』, 『진단시』 동인으로 참가해 시작 활동을 벌였다. 1973년 첫 시집 『귀로』를 펴낸 이후 『어둠고(考)』(1979), 『사랑법』(1984), 『뒤돌아 보고 살기』(1986), 『서울별곡』(1989), 『순수의 풍향계』(1994), 『춘하추동』(1998) 등의 시집을 냈다. 시 비평 및 시론 연구에도 몰두해 「시대고의 초극과 시 정신」(1974), 「한국 낭만파 시의 동질성 연구」(1986) 등을 발표했다. 시론집으로는 『현대한국시인론』(1983), 『한국시의 공간구조연구』(1991), 『현대시학 이론과 실제』(1993) 등이 있다.

2000년대 접어들어 ‘풍시조’를 개척해 ‘풍시조 시구’ 이론을 제시하는 등 시론을 실제화, 자신의 시에 직접 실천하면서 더 많은 시의 실험을 통한 시집을 펴내고 있다.

▲여행지에서 함께 한 박진환 시인과 부인 ⓒ박진환

[이계홍 전 언론인·소설가]

Copyright © 프레시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