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의 희생양 된 군인 명예를 살려낸 한 소년

김형민 입력 2022. 12. 3.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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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민 PD의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 미국 정부는 인디애나폴리스호의 재난이 승리에 누가 될까 두려워했다. 그 결과 모든 책임은 함장 맥베이 대령에게 돌아갔다. 수십 년 뒤, 한 소년이 그 사건에 관심을 갖는다.
헌터 스콧(위)의 활약으로 미 해군이 감추고 있던 역사가 드러났고 맥베이 대령의 누명이 벗겨진다. ⓒUSA 투데이 갈무리

영화 〈죠스〉에 어부 퀸트가 자신의 상어 공포 체험을 털어놓는 장면이 나온다. 퀸트는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다가 승선한 배가 일본군 잠수함의 어뢰를 맞고 침몰하면서 구명조끼를 입고 바다를 헤매게 돼. 그때의 회고담. “피 냄새를 맡고 상어가 몰려왔지. 상어의 눈은 검어. 마치 인형의 눈처럼 생명이 없는 눈 같지. 그 눈으로 빤히 쳐다보다가 갑자기 달려들지. 상어들은 가까운 사람부터 차례로 공격했고 물린 사람은 비명을 지르며 허우적댔지.”

퀸트의 얘기는 실화였다. 그가 탄 군함은 ‘인디애나폴리스’호라는 이름의 중순양함이었어. 이 배는 비밀 임무를 띠고 호위함 하나 없이 태평양을 가로질러 무사히 임무를 완수했다. 그 비밀 임무는 조립 전의 원자폭탄 수송이었지. 인디애나폴리스호는 이후로도 단독 항해하다가 일본군 잠수함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인디애나폴리스 같은 중순양함은 호위함의 동행이 필수적이야). 이 비극이 일어난 것은 일본이 원자폭탄 두 발을 맞고 두 손을 들기 15일 전, 7월30일이었어.

인디애나폴리스호의 항해는 기밀 사항이었다. 어뢰 피격 후 함장인 찰스 맥베이 대령은 구조 신호를 보내고 병사들을 탈출시켰다. 하지만 구조 신호는 어찌된 일인지 접수되지 않았어. 생존자들 수백 명은 무려 4일 동안이나 구조를 받지 못하고 바다에 떠다니다가 상어 떼의 습격을 받았다. 결국 많은 이들이 퀸트의 증언처럼 죽어갔지. 배가 침몰한 직후 바다에는 900명이 넘게 아우성 치고 있었지만 우연히 지나가던 미군 비행기가 그들을 발견하고 구조대가 도착할 즈음 생존자는 단 316명뿐이었단다.

미국 여론은 난리가 났다. 타이밍이 참 좋지 않았던 것이, 일본 본토를 언제 쓸어버리느냐의 문제만 남았다고 여유만만하던 즈음에 대참사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야. 지옥 같은 전쟁터를 버텨낸 자식들의 금의환향을 기다리던 유가족들부터 승리에 도취돼 있던 평범한 미국 시민들까지 펄펄 끓어올랐지. “누가 책임자냐!”

함장 맥베이 대령은 배를 잃긴 했지만 최선을 다했고, 눈에 띄는 과오를 저지른 것이 없었어.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는 중순양함에 호위함 없는 단독 항해를 지시한 수뇌부의 실책도, 분명히 구조 신호를 보냈다는 맥베이 대령의 증언도, 인디애나폴리스호가 제시간에 임무를 맡은 해역에 나타나지 않았는데도 신경을 쓰지 않은 상황도, 일본군의 잠수함 활동 관련 정보를 인디애나폴리스호에 제때 제공하지 않은 일도 깡그리 무시됐어. 해군과 미국 정부는 인디애나폴리스호의 재난이 찬란한 승리에 누가 될까 두려워했고, 책임 추궁 과정에서 더 많은 진실이 밝혀질 것을 염려했다. 그 결과 모든 책임은 맥베이에게로 돌아갔지.

당시 미군 해군 당국은 두 가지 과실로 맥베이를 기소하려 들었어. 첫째는 ‘적절한 시기에 배를 포기하지 않은 죄’였고, 두 번째는 ‘지그재그 운항을 통해 적의 잠수함을 경계하지 않은 죄’였어. 첫 번째 혐의는 어뢰 피격 후 단숨에 침몰해버린 사건 성격상 말이 되지 않았기에 슬그머니 거둬들였지만, 후자의 경우는 악착같이 적용했다. 심지어 군 검찰은 인디애나폴리스호를 격침시킨 일본군 잠수함장 하시모토 모치쓰라를 증인으로 소환하기까지 했지. 이건 “9·11 사태를 수사하는 뉴욕시 검찰이 뉴욕시 소방청장을 처벌하기 위해 (사태를 일으킨) 비행기 납치범을 소환한 것만큼이나 말이 안 되는(〈워싱턴포스트〉 2021년 6월6일)” 일이었지만 하시모토는 담담하게 사실을 밝혔다. “지그재그 운항은 없었지만 무슨 기동을 했든 우리는 인디애나폴리스를 격침시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군 검찰에 중요한 것은 “(잠수함 회피를 위해) 지그재그 기동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뿐이었어. 그러니까 유죄라는 것이었지. 애초 군법회의에 반대한 니미츠 해군 사령관은 얼마 뒤 맥베이를 원상복귀시키고 진급도 시켰지만, 그는 오래 버티지 못했어. 대중의 비난과 유족들의 원성은 계속 그를 괴롭혔다. 결국 맥베이는 자살하고 말았지.

2000년 10월 빌 클린턴 대통령이 맥베이 함장의 무죄를 선언했다. ⓒ연합뉴스

함장의 구조 요청 깔아뭉갠 사람들

수십 년 뒤인 1997년 미국 플로리다주의 열두 살 소년 헌터 스콧은 영화 〈죠스〉를 보게 돼. 어부 퀸트의 회고에 경악했던 소년은 그 사건의 무대가 된 인디애나폴리스호 사건에 관심을 갖는다. 그런데 함장이 미국 해군 사상 거의 유일하게 자신의 배를 잃은 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유죄판결을 받은 사실을 이상하게 여기고 그 내막을 탐구하는 일에 뛰어들지. 반세기 전의 사건, 이미 일종의 상식으로 굳어진 역사적 사실의 오류를 밝히려는 용감한 도전이었단다. 헌터 스콧은 인디애나폴리스호 생존자들 150여 명과 연락하고 문서 수백 건을 분석하면서 “함장은 억울했다”라는 결론을 낸다. 시작은 역사 과목 숙제였지만 그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맥베이 함장의 무죄 탄원 운동을 벌이면서 의회에까지 진상규명을 청원한 거야.

인디애나폴리스호 생존자들과 함께 의회에 나타난 스콧은 부르짖는다. “1년간 인디애나폴리스호의 생존자들과 이야기를 나눈 저는 이 부당함이 마땅히 수정돼야 한다고 여깁니다. 69세에서 92세에 이르는 이분들이 함장의 명예 회복과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미국 의회까지 나서서 재조사를 한 끝에 경악할 만한 사실이 여럿 밝혀진다. 우선 함장의 구조 요청은 사실이었다. 그것을 접수해야 할 사람들이 한눈팔다가 요청을 깔아뭉갰다. “이건 일본군의 역정보야!” 하며 무시했다는 치명적 사실을 포함해서 말이야. 마침내 10대 소년의 ‘역사 바로세우기’는 성공한다. 2000년 클린턴 대통령이 맥베이 함장의 무죄를 선언한 것이지.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골리앗’들은 비단 악한 거인들만이 아니야. 정의로운 여론일 수도 있고, 지당한 분노일 수도 있으며, 무엇으로도 위로되지 않는 슬픔의 에너지일 수도 있다. 그 정의와 슬픔과 분노의 불길을 모면하려는 무리들이 엄한 불쏘시개를 대신 던져 위기를 넘기는 꼼수도 드물지 않게 벌어지지. 맥베이 함장이 그런 희생양이 됐던 거야. 당시 미국 해군은 높은 사람들의 보신과 ‘승리의 영광’을 위해 맥베이 함장, 불운한 것 외에는 어떤 혐의도 없던 군인을 십자가에 매달았다. 헌터 스콧은 세월로 무게를 더한 은폐의 비밀을 캐냈고 마침내 억울한 군인의 명예를 살려냈던 거란다.

이번 이태원 참사에서 “경찰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라면서도 “시위가 있었기 때문에 경찰 경비 병력들이 분산됐던 그런 측면들이 있다”라고 한입으로 두말을 한 행정‘안전부’ 장관은 아무 일 없고, “(핼러윈은) 축제가 아니라 현상”이었다면서 “할 일을 다했다”라고 거짓말을 늘어놓은 용산구청장도 평온한데, 당일 현장을 뛰어다닌 소방관들과 파출소 순경들에게 책임이 물려지고, 지옥 같은 밤을 지새우고 손을 덜덜 떨면서도 침착하게 국민들에게 상황 설명을 했던 용산소방서장이 입건되는 모습을 보면서 아빠는 인디애나폴리스호와 맥베이 대령을 떠올렸다. 현장에서 죽을힘을 다한 이들에게 책임이 전가되는 풍경이 무슨 데자뷔처럼 펼쳐지고 있지 않니. 여기서 우리 모두에게는 헌터 스콧의 용기와 지혜가 필요할 것 같구나. 최대한 정확한 정보와 구체적 증언을 통해 사실을 재구성하고, 차제에 누군가를 화형대에 올려야 한다는 (그것이 용산소방서장이든 장관이든 관계없다) 강박으로부터 벗어나 사실 그 자체를 밝혀내야 한다는 뜻이야. 다시금 이태원 참사에서 숨져간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김형민(SBS Biz PD)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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