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꽃의 영화뜰] 내가 잘못하고 친구가 벌을 받았다

박꽃 이투데이 문화전문기자 2022. 12. 3.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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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오늘 박꽃 이투데이 문화전문기자]

친구를 꼬셨다. 학교 실습실에 있는 컴퓨터를 훔쳐서 팔자고. 그 돈으로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가서, 나는 꿈꾸던 예술가가 되고 너는 미항공우주국(NASA)에 취직하면 된다고. 아직 철이 덜 든 청소년쯤 된 아이들의 생각인가 싶지만, 실은 그보다도 어린 초등학생 두 명이 작당이 되어 벌이는 맹랑한 모의다. 한 명은 사립초등학교에 다니는 백인 어린이 폴(뱅크스 레페타), 다른 한 명은 아동보호시설 입소를 거부하고 은신 중인 흑인 어린이 죠니(제일린 웹)다.

두 어린이가 받아들인 운명의 무게는 같지 않다. 그걸 깨닫는 과정의 성장통을 말하는 작품이 '아마겟돈 타임 (Armageddon Time)'이다. 배경은 레이건 대통령이 당선되기 직전인 1970년대 후반, 지금보다 훨씬 더 노골적인 인종차별이 존재하던 때다. 컴퓨터를 훔친 사건 이후, 주인공 폴은 아버지가 몇 년 전 경찰에게 우연히 베풀었던 호의 덕에 무사히 풀려난다. 그러나 절도를 썩 내켜 하지 않았던 친구 죠니는 소년원에 가게 된다. 주도한 건 본인인데, 큰 벌을 받은 건 친구다. 그 친구는 흑인이고, 가난하고, 자신을 위해 나서줄 부모님도 없다.

▲ 영화 '아마겟돈 타임 (Armageddon Time)' 스틸컷.

제임스 그레이 감독의 '아마겟돈 타임'은 올해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으로 점쳐질 만큼 좋은 평가를 받았던 작품이다. 앤 해서웨이, 안소니 홉킨스 등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가 출연했고 '옥자'를 촬영한 다리우스 콘지 촬영감독이 합류했다. 무엇보다 천둥벌거숭이 같던 어린이를 둘러싼 주변 환경과 그로 인한 성장통을 무척 섬세하고도 날카롭게 묘사하며 주목받았다.

유대인이라서 대놓고 수모를 겪은 폴의 조부모와, 직업 때문에 은근한 차별을 당한 폴의 부모는 2대에 걸쳐 피나는 노력으로 집안을 일군다. 타고난 사회적 계급을 뒤엎을 정도의 부자가 된 건 아니지만, 적어도 후세대만큼은 좋은 교육을 누리고 소위 기득권으로 편입될 수 있도록 지원과 보호 아끼지 않으려 한다. 다만 그들의 헌신이 일종의 보호막으로 작용한 까닭에, 주인공 폴은 사회의 냉철한 감각에 다소 뒤늦게 눈을 뜬다.

자기 대신 친구가 경찰에 잡혀가던 날은, 철딱서니 없는 말썽만 골라가며 부리던 폴이 최초로 세상의 감각을 조금 터득하는 날이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때로는 침묵하고 비겁해져야만 하는 때도 있다.

나의 비겁함이 내 마음을 죄스럽게 할 때, 우리 주변의 어른들은 어떤 조언을 해줬던가. 폴은 자상한 할아버지(안소니 홉킨스)에게 조심스럽게 고백한다. '사립학교 친구들이 흑인 죠니와 논다고 수군대는데, 어떻게 해야 해요'. 할아버지는 '그럴 땐 남자답게, 옳은 행동을 해야 한다'고 다독인다. 그러나 그는 곧 노환으로 세상을 떠난다. 때마침 레이건의 당선과 맞물려 '진보적 행동'을 강조하던 시대의 흐름도 뒤안길로 접어든다. 이제 집안의 새 어른이 된 아버지는 폴에게 정반대의 말을 한다. “네 친구가 너 대신 벌을 받는 건 불공평한 일이야. 나도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게 정말 싫다. 하지만 내가 살면서 깨달은 건… 내게 온 행운은 그저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다.”

▲ 영화 '아마겟돈 타임 (Armageddon Time)' 포스터.

믿을 만한 주변 어른들의 엇갈리는 조언 속에서, 나 대신 소년원에 간 친구를 향한 죄스러움 속에서, 예술가를 꿈꾸지만 보수적이고 억압적인 사립학교 생활을 강요받는 상황 속에서, 폴은 결국 교실을 뛰쳐나온다. 그리고 영화는 지금껏 들려준 모든 이야기가 오래전 과거에 벌어진 일이었음을 암시하듯, 텅 빈 교실과 사람 없는 집안의 모습을 비춘다. 영화는 마무리되지만, 영화를 다 본 이미 다 커버린 '또 다른 폴'들은 불현듯 생각을 시작하게 된다. 과연 몇 번의 비겁함을 겪고, 우리는 어른이 되었나. 몇 번의 불공평함을 목격하고 지금에 왔을까. 몇 번이나 가족과, 학교와, 회사와, 주변과, 세상과 불화하며 여기에 이르렀나. 그때 내 주변에 있던 어른은 어떤 말을 해줬던가. 어떤 생각과 선택으로 겹겹을 쌓아, 지금의 내 모습이 되어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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