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천석 칼럼] 최악의 北核 위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1968년 위기’ 어떻게 넘었나 돌아봐야
한 보름 김정은이 핵폭탄과 미사일을 건드리지 않고 있다. 오랜만의 ‘핵(核) 휴가’도 김정은이 7차 핵실험 카드를 꺼내는 찰나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북한이 손에 쥔 ‘전술핵무기’는 탄생부터가 실전(實戰)에 써먹기 위해 만들어진 무기다. 눈치 챘든 못 챘든 우리 생각과 행동이 북한 핵무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북한은 상대의 선제공격을 예방하기 위해 핵무기를 개발한다고 했다. 방북한 문재인 대통령 특사에게 ‘내 자식들을 핵무기 위협 아래 살게 하고 싶지 않다’ 했다. 이 메시지가 한국 대통령 특사를 통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달되도록 해 미·북 정상회담과 남북 정상회담 시리즈를 이어갔다. 얼마 안 가 진실이 드러나고 한국은 거짓말 책임을 둘러썼다.
김정은은 올해 9월 ‘핵무력 정책법’을 발표하고 가면을 벗었다. 핵무력 정책법은 핵 선제(先制)공격의 이유로 북한 지도부에 대한 공격, 유사시 전쟁 주도권 장악 필요 등 5가지 상황을 열거했다. 미국 핵과학자협회(BAS)는 지난 9월 북한이 핵탄두 완제품 20~30개를 보유했으리라고 추정했다. 이스라엘·인도·파키스탄 등 후발(後發) 핵보유국이 십 단위에서 핵 보유를 멈춘 전례(前例)가 없다. 소규모로 핵을 보유하는 것은 유사시 상대의 대규모 핵공격을 불러와 더 위험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공격 미사일이 많을수록 상대의 미사일 방어망(MD)도 쉽게 뚫을 수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북 핵무기는 늘어나고 있다.
1957년 소련이 ICBM을 개발하자 미국은 국가 비상(非常)이 걸렸다. 소련 발사 미사일이 미국에 닿는 데 걸리는 30분 안에 방어와 반격에 필요한 판단과 행동을 완료해야 했기 때문이다. 1000명이 넘는 민간과 군 과학자들이 총동원됐다. 북한 미사일이 휴전선을 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길어야 10분, 짧으면 5분도 되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이 이 찰나 같은 순간에 국방장관·군(軍) 수뇌와 판단을 끝낼 수 있을까. 한국군 3축(軸)체제는 북한 핵무기를 막아낼 수 있을까.
한국 핵 방어 전략은 미국이 워싱턴과 뉴욕이 북한의 과녁이 되는 위험을 무릅쓰고 서울을 지켜주도록 하는 ‘확장억지전략’이다. 확장억지전략은 냉전(冷戰)이 한창이던 시절 소련 공격으로부터 ‘함부르크와 뮌헨을 지키기 위해 시카고와 뉴욕을 걸 수도 있다’던 미국과 서독 간 언약(言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련이 미국과 동반(同伴) 자살하는 사태를 두려워하며 합의가 지켜지리라는 쪽으로 기울었기에 일정 효과를 거뒀다. 북한이 최근 반복해서 미국을 과녁 삼은 ICBM과 한국을 겨냥한 단거리미사일 섞어 쏘기를 하는 것은 한·미 간 틈새를 벌리려는 수법이다.
북한 재래식 무기는 형편없이 낡았다. 재래식 전력(戰力)이 떨어질수록 긴급 상황이 닥치면 핵무기 쪽으로 손을 뻗게 된다. 핵 시대가 막 열린 1950~1960년대 초반 핵 위기가 자주 벌어졌다. 핵무기를 보유했지만 핵무기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는 터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정은의 핵 시위(示威)·핵 공갈은 그래서 더 위험하다.
최악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1968년을 돌아봐야 한다. 1월 21일 북한 무장 게릴라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했다. 이틀 후 23일엔 미국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원산 앞바다에서 북한군에 나포됐다. 미국은 사건 발생 즉시 베트남으로 향하던 핵 항공모함 진로를 변경해 현장으로 향하게 하고 닷새 후 두 척의 항공모함 전단을 증파(增派)했다. 그러나 미국 압박은 먹히지 않았다. 김일성이 미국이 미군 53만 명을 파병한 월남에서 몰리는 처지에 한국에 새 전선(戰線)을 열 수 없다는 사실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며칠 후인 1월 31일 북(北)베트남군과 베트콩은 8만 병력으로 남(南)베트남 100개 도시를 공격했다. 3월 초 베트남 주둔 미군 사령관은 본국에 20만6000명을 증파(增派)해 달라고 긴급 전문(電文)을 보냈다. 미국에는 더 보낼 무장한 사단(師團)도 없었다.
김일성이 멀리 베트남 전세(戰勢)를 엿봤듯 김정은은 대만 방위를 둘러싼 미·중 대결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대만 위기가 발생하면 일본 주둔 미군은 물론이고 주한 미군도 그 소용돌이에 빨려들게 돼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4월 30일 야당의 격렬한 반대 속에 향토예비군을 창설했다. 미국이 북한에 굽히고 들어가 푸에블로호 송환을 위해 교섭을 벌이는 것을 강력 항의해 특별군사원조를 받아내 군사력을 보강하는 응급조치를 취했다. 그렇게 위기의 1968년은 아슬아슬하게 넘어갔다. 54년 전 일이다. 지금 한국의 비상 대책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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