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 코리아] 리디아 고가 슬럼프에서 찾은 것

최수현 스포츠부 차장 입력 2022. 12. 3. 03:05 수정 2023. 11. 24.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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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소녀로 세계 1위 지키다 슬럼프 끝에 5년 만에 정상 복귀
실수하더라도 기회는 또 있다… 실패를 보는 새로운 관점 얻어

전성기를 누리다 한동안 부진에 시달린 끝에 재기에 성공한 스포츠 스타를 오래전에 인터뷰했다. 축하 인사를 건네며 ‘부활’ 소감을 물었더니 그는 농담처럼 웃으면서 뼈 있는 말을 했다. “저는 부활하지 않았는데요. 죽은 적이 없어요.”

그 뒤로 ‘부활했다’거나 ‘살아났다’는 표현을 쓸 때 신중해졌다. 그의 말이 맞는다. 잘나가던 선수가 한동안 성적을 내지 못하면 대중에게는 잊힌다. 그러나 그 시간 그는 치열하게 몸부림치며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들을 뼈저리게 깨닫고 생생하게 새긴다.

리디아 고가 지난달 21일 미국 플로리다주 네이플스의 티뷰론 골프클럽에서 LPGA 투어 올해의 선수상 트로피를 들고 있다. 그는 이날 시즌 최종전 CME 그룹 투어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했다./AP 연합뉴스

이번 주 여자 골프 세계 랭킹 1위에 복귀한 뉴질랜드 교포 리디아 고도 비슷한 말을 했다. 지난해 3년 만에 우승을 추가하고는 “사람들은 내가 ‘돌아왔다’고 하겠지만, 나는 과거의 나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긴 시간 골프장 안팎에서 영광과 좌절을 겪은 자신이 전과 같을 수 없다는 얘기였다.

그는 만 17세였던 2015년 세계 1위에 올라 2017년 내려왔다. 여자 골프 사상 가장 긴 시간인 5년 5개월 만에 세계 1위를 되찾았다. 슬럼프를 헤치고 나와 우승을 몇 차례 추가하는 선수는 종종 나온다. 그러나 세계 정상에 섰던 선수가 오랜 부진을 딛고 다시 그 자리에 오르기는 매우 어렵고 드문 일이다.

리디아 고는 만 15세 때 미 LPGA 투어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뿔테 안경에, 부드러운 스윙과 탁월한 쇼트게임 실력을 갖춘 그는 ‘천재 소녀’ 그 자체였다. 2014년 3승, 2015년 5승, 2016년 4승을 올리며 최연소 타이틀을 휩쓸었다. 2018년 1승에 그친 뒤 슬럼프가 찾아왔다. 리디아 고의 시대가 끝났다고들 했다. 어릴 때 크게 주목받다 부진에 빠진 뒤 재기하지 못하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지난해 1승에 이어 올해 3승을 더했다. 올해의 선수상, 최소 타수상, 상금왕을 휩쓸었다. 그는 2022년을 최고 시즌으로 꼽는다. 과거 천재 소녀 시절보다 훨씬 탄탄하고 꾸준한 골프를 했다. 5위 안에 든 대회가 12번이나 된다.

10년 가까이 LPGA 투어에서 뛰었지만 그는 아직 25세다. 천재 소녀 시절엔 우승이 쉽고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 같았다고 한다. 성적이 떨어지면서 자책과 비난에 시달렸다. “골프가 안되는 날엔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고 했다. 골프와 관계없이 늘 자신을 지지해주는 가족과 친구들, 곧 결혼할 남자 친구 덕분에 힘을 얻었다고 한다.

슬럼프의 밑바닥에서 건져올린 것은 “나쁜 샷, 나쁜 일에 대한 달라진 관점”이었다. 실패를 바라보는 새로운 눈이 그를 다시 오늘의 위치로 밀어올렸다. “좋은 날도 있고 나쁜 날도 있다는 것, 실수도 하겠지만 그만큼 기회도 많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고 했다. 완벽한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실수와 실패에서 빨리 빠져나온다. 샷이 생각대로 갔으면 좋은 일이고, 다른 데로 갔다면 다음 샷을 잘하는 데 집중하면 된다. “남이 보기를 하든 버디를 하든 나는 내 전략을 지키면서 내 몫의 버디 만들기를 원할 뿐”이라고 했다.

2년 전, 슬럼프의 터널 속에 있던 그가 15세 시절의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공개한 적이 있다. 지금 보니 마치 예언처럼 읽힌다. “어느 날 샷이 엉뚱한 곳으로 가고 퍼트가 빗나가더라도 겁먹지 마. 골프는 너를 버리지 않았어. 최연소, 최초의 기록보다 여러 사람에게 받게 될 격려를 꼭 기억해두렴. 너의 스윙은 왔다 갔다 해도 가족과 친구들은 너를 사랑할 거야. 열심히 훈련하고 스스로를 믿는다면 갑자기 도망쳐버린 골프가 돌아올 수 있어. 골프가 돌아왔을 때, 거친 길을 여행해온 너는 더욱 강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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