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의 불편한 진실] 상대평가, 어떻게 물리·경제를 죽였나

기자 2022. 12. 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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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교육시민단체인 ‘사교육 걱정없는 세상’에서 상대평가가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제기하고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나는 이 단체의 접근방식에 동의하진 않지만, 상대평가가 물리나 경제와 같은 과목을 ‘기피 대상’으로 만드는 문제점가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범 교육평론가·전 민주연구원 부원장

중년층 이상은 잘 모르겠지만, 수능 성적표에는 원점수가 안 나온다. 국·영·수는 100점 만점, 선택과목은 50점 만점인데 그중에서 몇 점을 맞았는지가 안 적혀 있는 것이다. 2005학년도부터의 일이니 벌써 오래되었다. 그 대신 석차등급, 표준점수, 백분위 등의 세 가지 상대평가 지표가 적힌다. 석차등급은 상위 4%까지 1등급, 11%까지 2등급, 23%까지 3등급…. 이런 식으로 9등급까지 매기고, 표준점수는 평균점에 비해 얼마나 높거나 낮은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왜 원점수가 없어졌을까? 당시 ‘선택’ 과목이 대거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교육당국은 ‘어느 과목을 선택했는지에 따라 유불리가 생기지 않도록 상대평가 지표만 제공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 결과 물리나 경제와 같은 중요한 과목들이 외면당하기 시작했다.

나는 예전부터 과학 선택과목들 가운데 물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왔다. 최근에는 이공계가 취업에 유리하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인기가 다시 높아졌는데, 이공계에 물리가 중요하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 수능 과학 과목들에서 가장 적게 선택하는 과목이 물리다. 2022학년도 과학탐구 선택자 가운데 물리Ⅰ 선택률은 33.1%로, 화학Ⅰ 38.7%, 생물Ⅰ 71.5%, 지구과학Ⅰ 72.2%와 비교했을 때 가장 적다(1인당 2과목을 선택하므로 합산하면 100%가 넘는다). 물리Ⅱ 또한 화학Ⅱ, 생물Ⅱ, 지구과학Ⅱ보다 선택률이 낮다. 그런데 일본의 대입시험인 센터시험의 선택률을 보면 물리 34.5%, 화학 46.8%, 생물 18.2%, 지구과학 0.5%로(2018년 기준) 물리가 두 번째다. 일본 물리가 한국 물리보다 쉬워서도 아니고, 일본인이 유난히 물리를 좋아해서도 아니다.

한국 수험생은 왜 물리를 기피할까?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물리를 선택한다는 인식 때문이다. 내가 물리를 선택하면 이들과 상대평가로 제로섬 경쟁을 펴야 하고, 따라서 높은 석차등급이나 표준점수를 받기 어렵겠지? 그러니 물리를 버리는 것이 합리적 선택이다! 똑같은 이유로 사회탐구 과목들 가운데 경제와 세계사가 버려졌다. 2022학년도 사회탐구 선택자 가운데 경제를 선택한 비율은 겨우 3.2%, 세계사는 9.8%로 사회탐구 9과목 가운데 각각 뒤에서 1, 2등을 차지했다. 공부를 잘하거나 ‘덕후’인 학생들이 경제나 세계사를 선택하는 것을 보고는 다들 기피한 것이다.

이처럼 상대평가는 합리적 과목 선택을 방해하고 교육의 다양성을 저해한다. 이런 문제를 피하기 위해 다른 나라들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OECD 국가들 대부분이 대입시험제도를 가지고 있는데, 대세는 논술형이고 주요 선진국 중에서는 한국·일본·미국만 객관식 대입시험을 보고 있다(지난해 9월30일자 칼럼 ‘수능에는 죄가 없다’ 참조). 그런데 논술형이든 객관식이든 다들 절대평가다. 논술형은 대체로 등급제 절대평가이고, 객관식은 대체로 원점수제 절대평가다.

일본의 센터시험에서 물리 기피현상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절대평가(원점수제)이기 때문이다. 미국 SAT의 경우 1년에 7회 치러지며 응시 시기와 횟수가 학생 재량인데, 선택과목의 경우 원점수는 안 나오고 200~800점 사이의 환산점수만 나온다. SAT 환산점수는 응시자 중 상대적 위치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회차별·과목별 난이도 차이를 보정(equating)하기 위한 것이다. 당연히 물리 기피 현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상대평가 지표 가운데 ‘표준점수’는 정시모집에 활용되는데, 또 하나의 황당한 불합리를 보여준다. 연도별 출제 난이도에 따라 표준점수 최고점이 달라지는 것이다. 2022학년도의 경우 ‘윤리와 사상’ 만점자의 표준점수는 66점, ‘동아시아사’ 만점자의 표준점수는 71점으로 5점이나 차이 났다. 선택과목에서 모든 문항을 맞히면 동일한 최고점을 주는 SAT(800점)나 센터시험(50점)과 전혀 다르다. 최근에는 수능 선택과목이 수학과 국어에도 무분별하게 도입되면서 이러한 과목 간 유불리 문제가 확대되고 있다. 나는 이것이 일종의 위헌적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교육당국이 선택과목을 지정하고 관리하는 과정에서 드러낸 난맥상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고교학점제가 수능과 맞지 않는다’는 오해도 교육당국이 자초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이범 교육평론가·전 민주연구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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