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연의 미술소환]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맹인에 대한 편지

기자 2022. 12. 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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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에르 텔레즈,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맹인에 대한 편지, 2007, 싱글채널 비디오, 27분 36초 ⓒJavier Tellez,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erie Peter Kilchmann, Zurich

여섯 명의 시각장애인이 미국 브루클린 매카렌 공원의 오래된 수영장에 나란히 앉아 있다. 그들 앞으로 거대한 코끼리가 등장한다. 한 사람씩 앞으로 나아가 코끼리를 만진 다음 처음 앉아 있던 벤치로 돌아간다.

베네수엘라 출신으로 뉴욕에서 활동하는 작가 하비에르 텔레스는 인도의 경면왕이 시각장애인들을 모아 코끼리를 만져보게 했다는 ‘군맹무상(群盲撫象)’의 장면을 구현해보았다. 옛글에서 시각장애인들은 각자가 만져본 부분으로부터 ‘무’ ‘키’ ‘돌’ ‘절굿공이’ ‘널빤지’ ‘항아리’ ‘새끼줄’을 떠올린다. 우리는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지만 다들 부분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전하는 이 이야기는, 사물을 총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자신의 주관과 편협함으로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의 한계를 언급할 때 소환된다.

한 사람은 코끼리의 피부를 더듬으며 코끼리의 귀와 얼굴을 찾고, ‘당신은 아름다워요’ ‘여기는 바다 같아요’ ‘나는 당신이 들립니다’ 같은 소감을 말한다. 코끼리의 피부를 ‘대저택의 커튼’에 비유하며 그가 만지는 대상이 얼마나 넓고 높은지 알 수 없었다고 고백하는 또 다른 시각장애인은 두려움을 전한다.

18세기 프랑스 철학자 드니 디드로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맹인에 대한 편지’에서 제목을 차용한 작가는, 정상성이라는 표준이 지운 세계로 우리의 시선을 돌리며, 눈이 보이든 안 보이든, 우리의 경험은 제한적이고, 서로가 상대의 경험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의 작품을 거쳐, ‘군맹무상’은 모든 존재가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을 경험하므로,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의미로 확장된다.

김지연 전시기획자·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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