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밭서 갓난아이 안고 스러진 엄마, 눈물겨운 4·3의 상흔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9〉 제주 다크투어리즘
제주를 시계방향으로 일주해보자. 출발은 4·3평화공원이다. 아래쪽 주차장에 들어서면 좌측에 둥근 돌담이 먼저 보인다. 비설(飛雪)이다. 담을 따라 돌아 들어가면 스물다섯 살의 엄마가 갓난이를 끌어안은 채 눈밭에서 고꾸라질 듯 버티고 있다. 조금 더 올라가면 우측에 봉안관이 있다. 발굴을 통해 수습된 4·3 희생자들의 유해 380기가 안치돼 있다. 사람의 뼈가 뒤엉킨 발굴현장(재현)에서도 눈을 질끈 감게 된다. 봉안관을 나와 더 올라가면 행방불명 희생자들을 만나게 된다. 3976기의 표석마다 이름이 하나씩 새겨져 있다. 그 옆의 위령 제단에는 1만4412명의 위패가 있다.
영모원에 군경과 희생자 함께 모셔
기념관으로 들어서면 전시실에서 가장 먼저 백비(白碑)를 만난다. 아무 글자도 새기지 않은 비가 눕혀 있다. 4·3은 ‘사건’, ‘반란’, ‘항쟁’ 등의 명칭이 뒤에 붙지만, 공식적으로는 제주4·3이다. 서운한 사람이 있지만, 상상력을 끄집어내는 효과도 있다. 전시실은 4·3의 모든 과정, 강요된 침묵과 진상규명을 거쳐 오늘에 이르는 역사를 차분히 보여준다.
4·3평화공원에서 바닷가로 내려가면 물빛이 아름다운 함덕해수욕장이 나온다. 그 동쪽에 서우봉이 있고, 서우봉 바닷가로 몬주기알(북촌리 2683)이 있다. 선흘리 사람들이 집단으로 총살(1948년 11월 26일)을 당했다. 학살은 정부수립 이후의 초토화 작전(1948년 11월~1949년 3월)과 한국전쟁 직후의 예비검속(1950년 8월)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로 발생했다.
비자림을 지나 다랑쉬굴(세화리 2605)로 갈 수 있다. 다랑쉬굴은 주민들이 피신해 살던 동굴이었다. 토벌대가 수류탄을 던져 넣고 불을 질러 11명이 굴속에서 죽었다. 1992년 제주4·3연구소가 세상에 공개하면서 큰 충격을 주었다. 다랑쉬굴 입구를 콘크리트로 봉해버렸으나 굴 안으로 공기가 통하는 숨골을 더듬어 볼 수는 있다. 다랑쉬굴에서 동쪽으로 내려가면 성산 일출봉이다. 일출봉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광치기해변의 북쪽 끝에 터진목이 있다. 성산읍 사람들이 학살당한 곳이고 지금은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아름다운 풍경에 슬픈 역사가 손깍지를 끼고 있다. 당시에 서북청년단원만으로 조직된 서청특별부대는 성산동국민학교에 3개월 정도 주둔했다. 하루하루가 고문과 처형이었다. 지금은 일부 폐허(성산리 179-4)가 남아 있고 그 앞에 표지가 설치돼 참혹한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표선해수욕장의 한모살 역시 학살지다. 중산간 마을 사람들이 잡히면 끌려왔다. 157명이 한꺼번에 학살당하기도 했다. 한모살의 학살터 표지는 표선도서관 입구(표선리 40-96)에 있다.
남원교차로에서 북쪽으로 1118번 도로를 가다가 소로로 들어가면 현의합장묘(수망리 893)를 찾을 수 있다. 큼지막한 봉분 세 개가 말끔해서 안도의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1949년 1월 주민 80여 명이 의귀국민학교에 집단으로 수용되었다가 학살당했다. 유족들이 모여 봉분을 단장하고 산담을 쌓은 것이 1964년이었다. 2003년 지금의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현의합장묘 원래의 자리(의귀리 765-7)에도 표지가 있다.
정부, 5·16 쿠데타 때 위령비 깨기도
영모원(하귀1리 1134-1)은 중산간이다. 하귀리 주민들이 세운 독립운동가와 군경과 4·3희생자 합동 위령단이다. 4·3에서 사후의 화해로 종종 인용된다. 죽은 자들에게도 화해가 성립하는 것인지, 소심한 나로서는 짐작하기 어렵다. 다시 해안도로를 따라가면 제주비행장의 해안 쪽에 도두봉이 있다. 이곳에서는 공항에서 뜨고 내리는 비행기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 가장 많은 학살은 제주공항 자리에서 벌어졌다. 발굴된 것만 382구, 아직도 활주로 밑에 유해가 깔렸을 것이다. 제주공항 북쪽 경계 바로 바깥에도 예비검속자 위령비(용담삼동 1199)가 있다.
제주항 여객터미널 건너편에는 주정공장 옛터가 있다. 학살 전에 집단으로 수용하던 시설이었다. 제주항국제여객터미널 동쪽의 별도봉 바닷가에는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이 있다. 1949년 1월 젊은이 수십 명을 학살했다. 나머지 주민들을 주변 마을로 옮겼고 마을을 전부 불태웠다. 곤을동은 사라졌고 지금은 집터만 남은 고즈넉한 바닷가이다.
제주4·3에서 군경과 가족, 서북청년단 등에서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가 1500여 명 있었다. 4·3특별법에 의한 희생자 1만4532명(2020년) 가운데 16%이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제주 십여 곳의 충혼묘에 있다. 제주시 충혼묘(노형동 산19-2)의 입구에는 무자비한 토벌에 반발한 부하들에게 암살당한 9연대장 박진경의 추도비가 세워져 있다. 남원 서귀포 조천의 충혼묘에서 서북청년단 애국단 민보단의 묘나 추모비를 볼 수 있다.
무장대 자체의 흔적은 거의 없다. 마지막까지 무장대를 이끌던 이덕구는 1949년 6월 경찰과 교전 중에 사망했다. 그는 가족묘(제주시 회천동 672)에 묻혀 있다. 현의합장묘에서 멀지 않은 송령이골에 무장대의 무덤(의귀리 1974-3)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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