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밭서 갓난아이 안고 스러진 엄마, 눈물겨운 4·3의 상흔

입력 2022. 12. 3. 00:2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9〉 제주 다크투어리즘
제주4·3평화공원 각명비. 제주4·3 희생자의 이름과 사망 일시·장소를 새겼다. [사진 윤태옥]
한라산 정상, 오름, 파란 바다, 검은 돌 해변, 수평선을 그려주는 어선들의 불빛, 돌고래와 가마우지…. 제주는 여행천국이란 걸 아무리 상찬한다고 해도 제주4·3은 새어나온다. 지난밤의 역사이고 오늘 아침의 상처다. 제주는 우리나라 다크투어리즘의 대표 격이다. 수많은 4·3의 흔적에서 전쟁과 평화, 학살과 생존, 민초와 권력, 우리 역사와 세계사의 연결 등등을 더듬어볼 수 있다.

제주를 시계방향으로 일주해보자. 출발은 4·3평화공원이다. 아래쪽 주차장에 들어서면 좌측에 둥근 돌담이 먼저 보인다. 비설(飛雪)이다. 담을 따라 돌아 들어가면 스물다섯 살의 엄마가 갓난이를 끌어안은 채 눈밭에서 고꾸라질 듯 버티고 있다. 조금 더 올라가면 우측에 봉안관이 있다. 발굴을 통해 수습된 4·3 희생자들의 유해 380기가 안치돼 있다. 사람의 뼈가 뒤엉킨 발굴현장(재현)에서도 눈을 질끈 감게 된다. 봉안관을 나와 더 올라가면 행방불명 희생자들을 만나게 된다. 3976기의 표석마다 이름이 하나씩 새겨져 있다. 그 옆의 위령 제단에는 1만4412명의 위패가 있다.

영모원에 군경과 희생자 함께 모셔

서북청년단특별부대 주둔지로 쓰인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성산리 성산동국민학교. [사진 윤태옥]
위령탑을 둘러싸고 있는 각명비는 마을별로 희생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상과 함께 사망 일시, 장소와 나이가 간결하게 기록돼 있다. 마을마다 깨알같이, 집집마다 디테일하게 한 사람 한 사람 차곡차곡 죽인 것이다. 4·3의 전체 희생자는 2만5000에서 3만명으로 추정하지만, 평화공원에 기록된 이름은 반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기념관으로 들어서면 전시실에서 가장 먼저 백비(白碑)를 만난다. 아무 글자도 새기지 않은 비가 눕혀 있다. 4·3은 ‘사건’, ‘반란’, ‘항쟁’ 등의 명칭이 뒤에 붙지만, 공식적으로는 제주4·3이다. 서운한 사람이 있지만, 상상력을 끄집어내는 효과도 있다. 전시실은 4·3의 모든 과정, 강요된 침묵과 진상규명을 거쳐 오늘에 이르는 역사를 차분히 보여준다.

4·3평화공원에서 바닷가로 내려가면 물빛이 아름다운 함덕해수욕장이 나온다. 그 동쪽에 서우봉이 있고, 서우봉 바닷가로 몬주기알(북촌리 2683)이 있다. 선흘리 사람들이 집단으로 총살(1948년 11월 26일)을 당했다. 학살은 정부수립 이후의 초토화 작전(1948년 11월~1949년 3월)과 한국전쟁 직후의 예비검속(1950년 8월)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로 발생했다.

제주 너븐숭이4·3기념관 앞의 현기영 『순이삼촌』 문학비. [사진 윤태옥]
몬주기알에서 큰길로 나오면 너븐숭이4·3기념관(북촌리 1599)이 있다. 기념관 앞에 애기무덤과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을 기리는 문학비가 있다. 열두 개의 석물이 널브러진 시신들처럼 바닥에 이리저리 쓰러져 있다. 현기영은 1979년 4·3의 신음을 소설에 담아 세상에 던졌고, 잡혀간 글쟁이의 손가락은 고문에 짓이겨졌다. 문학비에서 더 걸어가면 북촌초등학교, 1949년 1월 17일, 4·3 당시 단일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북촌리 학살사건의 현장이다. 주민 500여 명이 한날한시에 불귀의 객이 됐고 마을은 다섯 채만 남기고 모두 불탔다.

비자림을 지나 다랑쉬굴(세화리 2605)로 갈 수 있다. 다랑쉬굴은 주민들이 피신해 살던 동굴이었다. 토벌대가 수류탄을 던져 넣고 불을 질러 11명이 굴속에서 죽었다. 1992년 제주4·3연구소가 세상에 공개하면서 큰 충격을 주었다. 다랑쉬굴 입구를 콘크리트로 봉해버렸으나 굴 안으로 공기가 통하는 숨골을 더듬어 볼 수는 있다. 다랑쉬굴에서 동쪽으로 내려가면 성산 일출봉이다. 일출봉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광치기해변의 북쪽 끝에 터진목이 있다. 성산읍 사람들이 학살당한 곳이고 지금은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아름다운 풍경에 슬픈 역사가 손깍지를 끼고 있다. 당시에 서북청년단원만으로 조직된 서청특별부대는 성산동국민학교에 3개월 정도 주둔했다. 하루하루가 고문과 처형이었다. 지금은 일부 폐허(성산리 179-4)가 남아 있고 그 앞에 표지가 설치돼 참혹한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표선해수욕장의 한모살 역시 학살지다. 중산간 마을 사람들이 잡히면 끌려왔다. 157명이 한꺼번에 학살당하기도 했다. 한모살의 학살터 표지는 표선도서관 입구(표선리 40-96)에 있다.

남원교차로에서 북쪽으로 1118번 도로를 가다가 소로로 들어가면 현의합장묘(수망리 893)를 찾을 수 있다. 큼지막한 봉분 세 개가 말끔해서 안도의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1949년 1월 주민 80여 명이 의귀국민학교에 집단으로 수용되었다가 학살당했다. 유족들이 모여 봉분을 단장하고 산담을 쌓은 것이 1964년이었다. 2003년 지금의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현의합장묘 원래의 자리(의귀리 765-7)에도 표지가 있다.

그래픽=김이랑 kim.yirang@joins.com
서귀포 중문성당은 4·3기념성당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신사가 있었고 4·3에서는 학살터였다. 종교는 죽은 사람과 살아남은 사람을 위로할 때 종교답다는 것을 느낀다. 다시 송악산으로 가다 보면 산방산 직전에 안덕면 위령비(사계리 3630)가 있다. 산방산을 지나서 백조일손묘역(상모리 586-4)을 찾아갈 수 있다. 조상은 서로 다르지만 한곳에서 뒤엉켜 죽임을 당해 하나의 자손이 됐다는 뜻이다. 1950년 전쟁이 터지자 대한민국 정부는 ‘불온한 자’들을 예비검속으로 잡아들였다. 모슬포에서는 8월 20일 새벽 200여 명을 총살했다. 유족들이 시신을 겨우 수습한 것은 1956년 5월. 그러나 당국은 유족들을 불러 파묘하라는 회유와 협박을 계속하다가 5·16 군사쿠데타 직후에는 위령비를 깨버리기까지. 깨진 조각들은 지금 위령비 옆에 전시돼 학살에 덧붙인 학살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이 학살당한 곳은 섯알오름, 그곳에 추모비(상모리 1590-3)가 있다.

정부, 5·16 쿠데타 때 위령비 깨기도

제주 4 ·3평화공원의 비설(飛雪). 제주4·3 당시 군인들에게 쫓겨 두 살 난 젖먹이 딸을 등에 업은 채 총에 맞아 희생된 당시 봉개동 주민 변병생 모녀를 모티브로 만든 조각이다. [사진 윤태옥]
모슬포에는 문형순·조남순·김남원 세 사람의 공덕비(동일리 2995-1)가 있다. 문형순은 독립운동가였고 해방 후 경찰에 투신하여 제주도에 부임했다. 1948년 12월 군경은 대정읍 하모리의 좌익 총책을 검거해 관련자 백여 명의 명단을 압수했다. 이들 모두 처형위기에 놓이자 모슬포 경찰서장 문형순이 권유하고 조남수 목사와 김남원 민보단장이 설득에 나섰고 관련자들이 자수했다. 문형순은 전원 훈방했다. 자신의 목숨을 건 행동이었다. 문형순은 1950년 8월 성산포 경찰서장일 때에 군당국의 예비검속자 총살명령을 거부했다. 제주경찰청 본관 앞에는 그의 흉상이 있다.

영모원(하귀1리 1134-1)은 중산간이다. 하귀리 주민들이 세운 독립운동가와 군경과 4·3희생자 합동 위령단이다. 4·3에서 사후의 화해로 종종 인용된다. 죽은 자들에게도 화해가 성립하는 것인지, 소심한 나로서는 짐작하기 어렵다. 다시 해안도로를 따라가면 제주비행장의 해안 쪽에 도두봉이 있다. 이곳에서는 공항에서 뜨고 내리는 비행기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 가장 많은 학살은 제주공항 자리에서 벌어졌다. 발굴된 것만 382구, 아직도 활주로 밑에 유해가 깔렸을 것이다. 제주공항 북쪽 경계 바로 바깥에도 예비검속자 위령비(용담삼동 1199)가 있다.

제주항 여객터미널 건너편에는 주정공장 옛터가 있다. 학살 전에 집단으로 수용하던 시설이었다. 제주항국제여객터미널 동쪽의 별도봉 바닷가에는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이 있다. 1949년 1월 젊은이 수십 명을 학살했다. 나머지 주민들을 주변 마을로 옮겼고 마을을 전부 불태웠다. 곤을동은 사라졌고 지금은 집터만 남은 고즈넉한 바닷가이다.

1949년 1월 의귀국민학교에 수용됐다가 학살당한 주민 80여 명을 기리는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수망리의 현의합장묘. [사진 윤태옥]
일제가 패망한 그해 9월 10일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의 결성식은 도남오거리에 있던 제주농업학교에서 열렸다. 미군은 이곳에서 제주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고는 미59군정중대를 주둔시켰다. 4·3에선 진압부대가 있었다. 도내 유지들과 지식인, 자수자와 체포자들이 잡혀 와 고문과 취조를 당한 후 처형되거나 이곳을 거쳐 육지 형무소로 끌려갔다. 제주 시내에는 관덕정이 있고, 4·3의 시발점이라고 하는 1947년의 3.1절 기념식이 열렸던 북국민학교가 그 안쪽에 있다.

제주4·3에서 군경과 가족, 서북청년단 등에서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가 1500여 명 있었다. 4·3특별법에 의한 희생자 1만4532명(2020년) 가운데 16%이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제주 십여 곳의 충혼묘에 있다. 제주시 충혼묘(노형동 산19-2)의 입구에는 무자비한 토벌에 반발한 부하들에게 암살당한 9연대장 박진경의 추도비가 세워져 있다. 남원 서귀포 조천의 충혼묘에서 서북청년단 애국단 민보단의 묘나 추모비를 볼 수 있다.

무장대 자체의 흔적은 거의 없다. 마지막까지 무장대를 이끌던 이덕구는 1949년 6월 경찰과 교전 중에 사망했다. 그는 가족묘(제주시 회천동 672)에 묻혀 있다. 현의합장묘에서 멀지 않은 송령이골에 무장대의 무덤(의귀리 1974-3)도 있다.

윤태옥 답사여행객 kimyto@naver.com 지난 15년 동안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역사와 자연과 문화를 찾아다니고 있다. 최근 2년은 한국전쟁을 주제로 한 휴전선 지역, 바다의 역사를 주제로 한 서해·남해·제주 지역을 답사했다. 올해에는 바다의 역사 해외 여정을 시작했다. 여행하면서 『변방의 인문학』 『중국에서 만나는 한국독립운동사』 『길 위에서 읽는 중국현대사 대장정』 『중국 민가기행』 『중국식객』 등을 펴냈다. https://blog.naver.com/kimyto

Copyrightⓒ중앙SUNDAY All Rights Reserved.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