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샹란, 노래·연기로 관동군 사기 진작 총살 감”소문 무성

입력 2022. 12. 3. 00:20 수정 2022. 12. 4. 10:4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54〉
화베이 공략을 위해 만주를 출발하는 관동군. [사진 김명호]
1945년 8월 15일 오후 상하이, 일본 투항 소식과 동시에 중국 국기(청천백일기)가 번화가에 휘날렸다. 중국인과 일본인의 지위가 전도됐다. 어제의 통치자가 패배자로 변했다. 상하이에 입성한 국민정부군 제3방면군이 일본인을 중국인과 격리했다. 일본인 거주지역 홍커우(虹口) 일대를 수용소로 지정하고 포고문을 발표했다. “일본인의 승전국 국민 고용을 불허한다. 일본인은 승전국 국민이 끄는 인력거에 탑승할 수 없다. 등기를 마친 일본인은 번호표를 부착해야 한다. 외부출입은 허가를 받아야 한다.”

9월 9일 난징(南京), 일본 지나(支那) 방면군 사령관이 국민정부 육군 총사령관이 제시한 투항요구서에 서명했다. 승리자 중국의 요구는 추상같았다. “중국에 수립한 괴뢰정부에 참여한 한간의 명단을 제출해라.” 한간에 대한 정의도 “일본에 협조하거나 일본과 공모해 조국에 해를 끼친 민족 반역자”라고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일 군인들 사이 리꼬랑 열풍, 군부도 우려

푸순(撫順)의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동생들과 함께 부친과 기념 사진을 남긴 리샹란(뒷줄 가운데). [사진 김명호]
이튿날 입법원(立法院)이 한간처벌조례(漢奸處罰條例)를 발표했다. 내용이 무시무시했다. “죄의 경중에 따라 사형 혹은 무기징역에 처한다. 정치·경제사범 외에 영화, 희극, 선전, 보도를 통해 일본을 찬양하고 국민을 현혹한 만영(滿映) 소속 문화한간도 죄과에 따라 사형이나 무기징역에 처한다.” 온갖 소문이 나돌았다. “숙친왕(肅親王)의 딸 진비후이(金壁輝·금벽휘)는 만주국 수립에 한몫한 일본 간첩이나 마찬가지다. 사형이 마땅하다. 노래와 연기로 관동군의 사기 진작과 중국인의 일본 숭배를 도모한 리샹란(李香蘭·이향란)도 총살 감이다.”

일본 패망 1년 전 만영을 떠난 리샹란은 상하이 머무르고 있었다. 11월 중순 국민당 특무기관원이 일본인 수용소에 나타났다. 리샹란을 호출했다. “수용소는 귀국을 앞둔 일본인 대기소다. 중국인은 있을 자격이 없다. 문화한간 혐의로 체포한다.” 특무들은 리샹란을 독방에 격리했다. 감시가 삼엄했다. 뇌물을 주면 외부인 면회는 허락했다. 미화 5000달러면 석방도 가능하다는 면회객이 있었다. “머지않아 재판에 회부된다. 재판관은 벌을 주는 것이 목적이다. 생사람을 잡은 것이 밝혀져도 절대 후회나 반성할 줄 모르는 이상한 동물들이다. 양심적인 사람은 극소수다. 네가 아무리 일본인이라고 우겨도 소용없다.”

틀린 말이 아니다. 만영이 제작한 영화에 리샹란은 일본과 일본인을 하늘처럼 여기는 가련하고 총명한 중국 여인 역만 맡았다. 리샹란의 일본어 발음은 리코란이었지만 다들 리꼬랑이라고 불렀다. 전선에 있는 일본 군인들의 리꼬랑 열풍은 군부가 우려할 정도였다. 위문공연 와서 금지곡 ‘이별의 블루스’를 한 곡 뽑아대면 온몸을 비틀며 어쩔 줄을 몰랐다. 전쟁 끝나면 리꼬랑 같은 중국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군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리샹란 “문화 혼혈아로 만든 아버지 원망”

중·일 수교 후 의회 방문단 일원으로 40년 만에 중국을 방문한 왕년의 리샹란과 야마구치 요시코를 맞이하는 예술인들. [사진 김명호]
감칠맛 넘치는 정확한 베이징 방언과 중국 여인 특유의 몸놀림 외에 생활 습관까지 리샹란은 영락없는 중국인이었다. 일본인이라 여기는 중국인이 없는 것처럼 일본인이라 생각하는 일본인도 없었다. 이유는 만주에서도 그랬지만 소녀 시절 베이징 체험 때문이었다. 펑텐(奉天)에서 중학을 마친 리샹란에게 부친이 권했다. “펑텐은 만주 최대의 도시다. 고도(古都) 베이징에 비하면 평범한 도시나 다를 바 없다.” 자식이 사랑스러우면 멀리 떨어진 곳에 보내라고 했다. 리샹란은 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남달랐다. 예쁘고 큰 눈망울로 부친을 주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샹랸의 회고를 소개한다. “아버지는 텐진(天津) 위수사령관과 시장을 역임한 판위꾸이(潘毓桂·반육계)에게 나를 맡겼다. 3일간 내 전학수속 마치고 펑텐으로 돌아갔다. 내 신분은 만주에서 베이징의 친척 집에 온 여학생으로 둔갑했다. 판 시장은 내 본명인 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와 딸의 항렬인 화(華)를 섞어서 판수화(潘淑華·반숙화)라는 중국 이름을 지어줬다. 판씨의 집은 대저택이었다. 호화롭기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옆에 붙어있는, 중국 화단의 거장 치바이스(齊白石·제백석)의 집이 경비실로 보일 정도였다. 100명이 넘는 식구 중 일본인은 나 하나였다. 본격적인 중국학생 생활이 시작됐다.”
일본 패망 후 동북(만주)을 해방시킨 소련군. [사진 김명호]
1935년 리샹란이 전학 온 이자오(翊敎)여중은 베이징의 명문 교회학교였다. 학내 분위기는 일반 중국학교와 차이가 없었다. 항일색채가 강했다. 관동군과 합세해 화베이(華北)를 점령한 일본군이 베이징을 압박하자 연일 항일 집회와 시위가 줄을 이었다. 리샹란은 세상을 하직하는 날까지 3년에 걸친 베이징의 중학 시절을 잊지 못했다. “학우나 교사들은 내가 일본인인 줄 몰랐다. 교내 집회에 참석해도 그냥 앉아만 있었다. 거리에서 시위대와 마주치면 골목으로 뛰어들어갔다. 경찰이 휘두르는 몽둥이에 쓰러진 중국인을 보면 벽에 머리를 묻고 울었다. 나를 문화 혼혈아로 만든 아버지를 원망했다.”

가끔 부친이 보낸 청년이 리샹란을 찾아왔다. 깔끔한 복장에 중국어가 유창한, 잘생긴 관동군 장교였다. 올 때마다 같이 밥 먹고 차 마시고 왕푸징(王府井)을 산책했다. 만남이 계속되면서 현직 만영 보도부장인 것을 알았다. 하루는 “일본군이 베이징을 침략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며 평소에 안 하던 질문을 했다. 판수화는 주저하지 않았다. “베이징 성벽으로 달려가겠다. 중·일 양군이 쏘아대는 총탄을 맞고 죽어버리겠다.”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대답에 청년은 놀라고 판수화는 거리에서 통곡했다. 〈계속〉

Copyrightⓒ중앙SUNDAY All Rights Reserved.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