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선문’의 그 의사는 왜 ‘사과주’에 몸을 절였을까

한은형 소설가 2022. 12. 3. 00:0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주말-한은형의 밤은 부드러워, 마셔] 칼바도스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압생트에 미치고,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칼바도스에 미친다는 소리를 듣고 흣 하고 웃었다. 문학을 한다고 할 수 있는 나는 칼바도스에 미치진 않았어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기 때문이다. 칼바도스는 레마르크의 소설 ‘개선문’에 나와서 이렇게 되었다. 또 술이 나오는 무수한 소설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개선문’이 아닐까 싶다.

‘칼바도스 하면 개선문, 개선문 하면 칼바도스’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을 많이도 보아왔다. ‘개선문’은 읽지 않았어도 ‘개선문 하면 칼바도스 아닌가요?’라고 묻는 사람도 꽤나 봤고. 얼마 전 읽은 산문집에도 그런 말이 나왔다. ‘개선문’의 주인공이 의사라는 것은 기억나는데,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칼바도스만은 기억난다고. 나는 이 부분을 읽다가 또 웃었다. 나 역시 그랬기 때문에.

레마르크의 소설 ‘개선문’으로 유명해진 사과주 ‘칼바도스’. /위키미디어

고등학생 때의 일이다. 어느 날인가 집에 있던 세계문학전집 중 한 권을 읽기 시작했는데, 그게 ‘개선문’이었다. 무척 재미있게 읽었고, 나 역시 칼바도스를 마음에 새겼다. 당시 나의 집에는 양장으로 된 100권 정도 되는 세계문학전집이 있었는데, 거의 사람의 손길이 닿은 적이 없는 물건이었다. 100권은 아닐 수도 있다. ‘상당히, 지겹게 많다’라는 나의 느낌을 100이라는 숫자로 표현했을 뿐. 그 책더미는 내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거기(창고에) 있었고, 어떻게 있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더 놀란 것은 세로쓰기로 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세로쓰기라니… 대체 어느 시대의 물건인가? 아무도 읽지 않을 물건을 왜 들인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세로쓰기로 그 소설을 읽고 나서 십 년이 더 지나 파리에서 칼바도스를 마셨다. 메뉴판에 있어서 시켰는데, 다 마시지 못했다. 일단 코를 찌르는 그 냄새가 이 술이 맛있지 않을 수도 있다며 경고한다고 느꼈는데, 한 입 마셔보니 나의 직감이 맞았다. 내가 먹어본 술 중에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맛이 없었다. 사과로 만든 술이 어쩜 이렇게 쓰기만 하고 향기는 없고 알코올 냄새만 가득한지….

칼바도스를 잊고 살다가 몇 년 전 샤를 드 골 공항에서 환승할 때 한 병을 사 왔다. 내가 파리에서 마셨던 칼바도스가 그렇게나 고약했던 것은 너무 싼 걸 마셔서 그런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XO 등급 이상의 좋은 걸 마시면 다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자기가 먹어본 술 중에 가장 맛있는 게 칼바도스였다는 누군가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꽤나 희귀하고 비싼 물건으로 보였다는 말과 함께.

문제가 있었으니, 샤를 드 골 공항의 주류 코너에는 별게 없었다. 술 자체가 많지 않았고, 칼바도스도 종류가 별로 없었다. 노르망디 지역 특산품이라니 노르망디에 가야 하나 싶을 정도로. 별수 없이 가장 비싼 XO 등급 한 병을 샀는데, 그래봤자 60유로 정도도 안 되었던 기억이 난다. XO 등급이라지만 십만 원도 안 되는 증류주가 그다지 맛있을 것 같지는 않아서 조용히 절망했었다. 칼바도스의 등급 체계는 꼬냑과 비슷해서 가장 낮은 등급인 VS부터 VSOP, XO, 오다쥬(Hors d’âge)까지 있는데 나는 오다쥬 급을 원했다.

며칠 전, 갑자기 궁금해졌다. 왜 그렇게나 칼바도스라는 단어가 ‘개선문’ 하면 떠오르게 된 건지. 추워지니 칼바도스 생각이 났고, 으스스한 파리가 배경인 ‘개선문’까지 생각이 났던 듯하다. 세로쓰기가 아닌 가로쓰기로 된 정상적인(?) ‘개선문’을 몇 장 읽지도 않다가 알았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걸. 의사인 주인공 남자가 처음으로 마시는 술이 칼바도스고, 한 잔 마시는 게 아니라 거의 들이붓다시피 마신다. 한 잔만 시늉만 하듯 마시는 게 아니라 거의 칼바도스에 몸을 ‘절인다’.

그렇다. 그건 마신다고 할 수 없다. 그렇게 마시는 것은 절이는 것이다. 설탕에 절이면 당장(糖藏), 소금에 절이면 염장(鹽藏)이라고 하듯이 저런 건 주장(酒藏)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남자는 사랑하게 되지만 당장은 무시하고 있는 여자와 그 술을 마시는데, 이런 식이다. 일단 한 잔씩 원샷, 그 다음 칼바도스 더블을 또 한 잔씩. 이걸로 끝이 아니고 또 더블을 한 잔씩 한다. 한 사람이 다섯 잔의 칼바도스를 마신 것이다. 코를 찌르는 듯 향기로운 사과주를. 남녀는 열 페이지가 진행되기도 전에 이렇게 마셔대고 있다. 그러고 나서도 남자는, 또 남녀는 칼바도스로 계속 절인다.

이 책에 칼바도스만 나오는 건 아니다. 와인과 샴페인, 꼬냑과 아르마냑, 보드카, 크렘 드 망트(creme de menthe), 페르네, 뒤보네, 키르쉬 등등이 나오는데 모두 칼바도스에 밀린다. 남자가 거의 칼바도스를 마시기 때문에. 여자와 헤어진 그에게 친구가 칼바도스를 권할 때를 빼고는. 남자는 말한다. 칼바도스는 곤란하다고. 남자의 마음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칼바도스는 그녀와 그, 둘의 술이라고. 그녀가 없을 때는 칼바도스를 마시지 않는다고.

마음을 건드리는 장면도 칼바도스와 관련되어 있다. 재회한 남녀는 술을 마시고, 여자는 한 잔 더 달라고 한다. 칼바도스 한 잔 더 주겠다는 남자에게 여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게 칼바도스냐고. 남자가 몰랐던 거냐고 묻자 여자는 그렇다고 한다. 남자는 여자보다 칼바도스에 훨씬 더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또 다른 장면도 있다. 멀어진 남녀가 오랜만에 여자의 집에서 만났는데, 여자가 칼바도스를 따라고 하지만 남자는 싫다고 한다. 그들만의 술인 칼바도스를 그런 기분으로 마시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꽤나 쓸쓸한 장면들이다.

칼바도스로 인해 맺어진 사이라 더 그렇다. 그들이 다시 만나 남녀 사이가 된 건 칼바도스 때문이었다. 보드카를 마시다가 여자가 말한다. 처음 만난 날 내게 준 술이 뭐냐고. 남자가 꼬냑 아니었던가 하고 묻자 여자는 다른 거라고, 그 술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못 찾았다고 말한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 마신 것 중 최고로 따스했다고. 여자가 그걸 마셨던 술집 이야기를 하자 그제야 남자는 말한다. 칼바도스였을 거라고. 노르망디 산 사과로 만든 화주였다고.

화주, 화주(火酒)라니. 마치 이 단어를 처음 들은 것처럼 화주라는 단어가 마음을 뜨겁게 했다. 불타오르는 술이라니. 그래서 불타오르게 하는 술이라니. 날씨가 추워서 화주를 마셨겠지만, 여자가 저 말을 한 순간 칼바도스는, 그 화주는, 남자의 마음까지 불타오르게 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마신 술 중 최고로 따뜻했다는 그 말에 화르르.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