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어렸을 적엔…” 그람시가 아들에게 남긴 옥중 편지, 짧지만 긴 여운[그림책]

여우와 망아지
안토니오 그람시 지음·비올라 니콜라이 그림
이민 옮김 | 이유출판 | 42쪽 | 1만5000원
정치범으로 투옥된 아버지는 감옥에서 가족과 친지에게 편지를 썼다. 노트 30여권에 남긴 글 중에는 당시 엄혹한 현실에 대한 날선 비판도 있었지만, 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작은 이야기도 있었다. 옥중에서 보내지 못한 채 남은 조각 글은 사후에 책으로 묶여 출판됐다. 세심한 문체와 인간애가 넘치는 작품이라는 평가 속에 이탈리아 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감옥에서 보낸 편지>다.
그림책 <여우와 망아지>는 그람시가 아들 델리오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그림을 붙여 만들었다. 그는 어린 시절 사르데냐 산골 마을에서의 경험 중 한 장면을 꺼내 아들에게 들려준다.

“아빠가 어렸을 때 동네에서 이런 말 한 마리를 본 적이 있어.” 망아지가 언제 태어날지 알고 있는 여우는 몰래 숨어 있다가 갓 태어난 망아지의 연약한 귀와 꼬리를 싹둑 먹어 치운다. 어미 말은 망아지를 보호하기 위해 주위를 맴돌지만, 여우가 더 날쌘 탓에 동네에서는 꼬리나 귀가 없는 말들이 가끔 눈에 띈다. 그런 말에게 한 할아버지는 가짜 꼬리와 귀를 달아주어 개구쟁이들의 놀림으로부터 보호한다.
“이제부턴, 아빠가 처음으로 여우와 마주쳤던 이야기를 해줄게.” 아름다운 꼬리를 깃발처럼 쳐든 여우는 사람을 보고도 놀라기는커녕 아무렇지 않게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다. 왠지 무시당한 기분이 들어 여우에게 돌을 던져봐도 여우는 슬쩍 물러나는 척만 할 뿐이다. 막대기를 집어 어깨에 걸치고 총 쏘는 시늉을 해도 마찬가지다.

바로 그때, ‘타앙!’ 엄청난 소리가 울려 퍼지고 누군가가 정말로 총을 쏘자 여우는 재빨리 도망쳐 덤불 속으로 사라진다.
결말은 언뜻 허망하게 느껴진다. 흔히 예상되는 동화 속 교훈도 없다. 그저 그때 그것을 보았노라고 아버지 유년 시절의 경험을 전달할 뿐이다. 때때로 어린 시절의 경험은 구체적인 내용보다도 한 컷의 사진처럼 강렬한 분위기로 기억된다. 일러스트레이터 비올라 니콜라이는 “어린 시절 현실을 마법이나 동화처럼 느꼈던 것에 초점을 맞춰 환상적인 요소를 추가해 그림을 그렸다”고 밝혔다.
따스한 노란빛이 배경으로 깔린 일러스트 속 시골 풍경과 여우, 망아지는 정답고 목가적인 풍경으로도 보였다가 한편 잔혹하게도 느껴진다.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에 저항했던 그람시가 아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유수빈 기자 soop@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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