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통제되는, 가슴 답답한 세상…‘처방전 찾듯’ 책을 다시 뒤적입니다[은유의 책 편지]

기자 입력 2022. 12. 2.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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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로 숨쉬는 법
김진영 지음
한겨레출판사 | 756쪽 | 2만5000원

김진영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선생님의 철학 강의를 열심히 들었고 선생님이 쓰는 지성과 슬픔의 언어를 동경했던 독자입니다. 2018년도에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고서야 출간된 선생님의 아도르노 강의록 <상처로 숨쉬는 법>을 한 번씩 꺼내봅니다. 가슴이 답답할 땐 표지만 봐도 숨이 쉬어지는 것 같거든요. 755쪽에 달하는 본문을 처방전 찾듯 뒤적이곤 합니다. 상처가 허파가 되리란 기대로요.

지난 10월29일 이태원에서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핼러윈 축제를 즐기러 갔던 젊은이들이 골목길에 갇혔고 158명이 길에서 선 채로 압사를 당했습니다. 10만명 넘는 인파가 몰리는데도 사전 대책이 없었고 희생자들의 최초 신고로부터 4시간이 지나서야 경찰이 출동했습니다. 살릴 수 있었는데, 이번에도 살리지 못했습니다. 정부는 재빠르게 참사를 사고로 희생자를 사망자로 쓰도록 지시했고 국가애도기간을 지정했습니다. 지역 축제와 공연이 취소되었죠.

이 엄청난 참사 앞에 책임지고 물러나는 행정관료 하나 없이 예술가의 노동만 간단히 중단시켜버리는 저들의 비겁함에 분통이 터졌습니다. 선생님이 살아계셨다면 뭐라고 말했을까. <상처로 숨쉬는 법>을 보는데 아도르노의 말이 다가왔죠. “문명이 지닌 상처이며 비사회적인 감성인 슬픔은 인간을 목적의 왕국에 종속시키는 일이 온전하게 성공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세상은 다른 어떤 것보다 슬픔이나 애도를 온갖 방식으로 치장하고 변질시켜 사회적인 형식으로 만든다.”

‘애도의 계엄령’이 내려진 여기 현실을 훤히 보는 듯, 선생님은 ‘슬픔에 대한 관리 통제’에 대해 설명하셨죠. 사회는 무슨 방식을 쓰든지 슬픔을 관리하려 한다. 마음껏 슬퍼하도록 허용하면 대단히 위험할 수 있기에 일정한 처리방식을 따라가도록 한다고요. “사람들이 깊은 슬픔에 빠지게 되면 하나의 인식에 도달하는데, 그 대상은 결코 슬픔의 감상이 아니라 바로 사회적 삶의 조건들에 눈뜨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슬픔은 위험한 감정입니다. 가족을 뺏기고 일자리를 뺏긴 사람들, 온갖 사회적 참사 피해자의 언어로 세상을 공부한 저도 슬픔이 얼마나 큰일을 하는지 똑똑히 보았습니다. 사람이 소중한 것을 잃으면 세상이 보이는 사람이 됩니다. 슬픔의 렌즈로만 보이는 은폐된 진실을 보기에 권력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로 거듭 나죠.

그래서인지 이번 참사는 유가족과 생존자의 목소리가 유독 들리지 않았습니다. 유가족은 참사 한 달이 다 되어서야 기자회견을 가졌습니다. 내 자식이 “생매장” 당했는데도 제대로 된 책임 규명이나 진정한 사과 없이 보상금부터 제시했다며 오열했지요. 유가족의 말은 슬픔을 통제하고 덮으려는 정부의 처사를 꿰뚫는 말이었습니다. 선생님, 진실은 언제나 현장에 있지요. 사고 직후 이태원 참사 현장에 갔을 때 하얀 국화꽃과 애도의 말을 써붙인 포스트잇이 이 가을 낙엽처럼 수북했는데요. 한 청년의 사연은 이랬습니다.

“친구들아 난 너희의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우린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이제까지 정말 쉼없이 달려오고 치열하게 살아왔잖아. 못다 이룬 꿈도 있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았을 텐데 너무 빨리 끝나버린 삶이 얼마나 허망할까. 그동안 고생 많았어. 꼭 안아주고 싶다. 다음 생에는 꼭 꿈도 이루고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며 오래오래 무탈하게 잘 살기를 바랄게. 이번 생도 그랬으니 다음 생에도 내 친구가 되어줘.”

그날 참사의 희생자의 90%는 태어나서부터 ‘쉼없이 달리는 삶’을 강요받은 이삼십대였습니다. 숨통 좀 틔우고 생의 기쁨을 누리려다가 목숨을 앗겼죠. 남의 일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 또래의 자식을 두기도 했지만 저도 올해는 기회가 닿는 대로 ‘인파’ 속에서 놀았거든요. 코로나19로 중단되었던 록페스티벌에 갔습니다. 그곳에는 몸을 부딪히며 슬램을 즐기고 음악에 몸을 흔드는 젊은이들이 다수였지만 저처럼 중년의 록마니아도 있고 목발을 짚거나 휠체어를 탄 장애인도 있었지요. 스탠딩 가장자리에서 젊은 부부가 아이와 손잡고 춤을 추기도 했습니다. 만에 하나 예기치 못한 참사가 일어났다면 왜 몸도 성치 않는데 저길 가서, 왜 아줌마가 저길 가서, 왜 애를 데리고 저길 가서, 라는 비난을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이 누차 강조하던 객관적 권력, 즉 “우리를 지배하는 모든 것, 생의 기쁨을 빼앗아가려는 모든 것, 우리의 자유를 박탈하려는 모든 것”의 정체가 이번 참사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슬픔이 통제되고 놀이가 비난받고 능력만을 찬양하는 이 일그러진 세상에서 시험과 노동에만 복속된 삶을, 우린 누구를 위해 평생 살아야 하는 걸까요.

선생님이 책에 남긴 결론을 붙들어봅니다. “도대체 상처 없는 삶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사람답게 사는 사회란 무엇일까.” 생각해볼 때 그것은 “이렇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고 하셨어요. 단어 하나하나가 사무칩니다. 일하다가 죽거나 즐기다가 죽어간 이들이 살고자 했던 삶을 잊지 않겠습니다. “나의 상처로부터 해방이 되려면 이 사회적인 상처를 볼 줄 알아야 된다”는 아도르노의 메시지를 새기며 일상을 애도로 이어가겠습니다.

은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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