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미래] 무해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입력 2022. 12. 2. 17:15 수정 2022. 12. 2.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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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은수의 책과 미래 ◆

해로운 것으로 가득한 세상이다. 갈수록 안전히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다닐 곳도 줄어든다. 달콤하나 건강을 해치는 음식들, 지구를 파괴하는 유해 성분이 들어간 제품들, 즐기러 갔다가 한순간 깔려 죽고 빠져 죽고 불타 죽는 장소들이 우리를 기다린다.

인간관계 역시 해롭기 그지없다. 일하러 갔는데 갑질을 견뎌야 하는 직장, 사랑의 거절을 죽음의 위협으로 돌려받는 만남, 친밀한 우애 대신 모욕적 언어를 주고받는 모임 등이 넘쳐난다. 사랑을 모르는 듯 생존을 강요받는 세상에서 아무에게도 상처 주지 않는 '무해한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갈망은 점점 커져만 간다. 각자도생과 적자생존 시대에 무해함은 우리가 추구해 이룩할 만한 자율적 도덕성의 보루처럼 느껴진다.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 몇 해 전 최은영 작가의 '내게 무해한 사람'이 사람들 마음을 울리고 베스트셀러에 오른 이유일 테다. 문학잡지 '리터'(민음사 펴냄) 최신호 특집에 따르면 무해함의 추구는 이 시대의 미덕이 되었다. 유독하고 유해한 세상에서 타인의 삶을 흔들고 망치는 대신에 안전하고 안심할 수 있는 다정한 존재로 사는 일이 실존의 미학으로 격상했다.

그러나 백승주 전남대 교수는 무해한 소통이나 무해한 관계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관계란 각자 자아의 독으로 서로를 오염하는 일이고, 상처 없는 관계는 인간을 능동적 주체가 아니라 수동적 사물로 대할 때만 가능하다. 상대를 어리고 순진하고 무해한 존재로 만드는 일은 상대를 마음대로 다루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과 다름없다. 허윤 문학평론가는 무해함만 존재하는 세계에선 공감과 이해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연숙 문화비평가에 따르면, 무해함의 시각적 존재 방식인 귀여움은 '약하고 부드럽고 망가지기 쉬운 형태와 질감'을 갖춘 것을 뜻한다. 건드려 쓰다듬고 싶고 만져 찌그러뜨리고 싶을 때, 그러나 우리의 거친 손길을 견딜 만큼 수동적일 때 우리는 그 대상이 귀엽다고 느낀다. 무해란 우리의 전도된 가학성의 표현이다.

법 없이도 살 만한 착한 사람들이 이룩하는 '무해 공동체'에 안식하는 건 순진한 자기 기만에 불과하다. 우리를 불화에 빠뜨리는 적들이 그토록 허약할 리 없다. 프란츠 카프카를 절망에 빠뜨린 것은 적들이 너무나 힘세고 교활하며 심지어 똑똑하고 부유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숨어도 적은 늘 그를 찾아냈고, 아무리 도망쳐도 적은 항상 그의 앞에 있었다. 카프카는 나쁜 세상에서 한순간도 탈출을 포기하지 않았으나, 언제나 막다른 골목에서 울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절망 자체가 희망보다 고귀하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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