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관찰] 질레트 '면도기-면도날 전략'의 출발

2022. 12. 2.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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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기 특허 만료후 경쟁구도
면도날을 파는 회사로 선회
'기기는 싸게, 소모품 비싸게'

◆ 김영준의 마켓관찰 ◆

폴라로이드, HP, 아마존 킨들. 이들 기업은 소비자들에게 기기를 저렴하게 팔고 그 기기에서 사용되는 필수 소모품을 비싸게 파는 전략을 취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른바 '면도기-면도날' 모델이다. 이 전략은 질레트가 최초로 사용한 이후 수많은 기업들에 복제되어 지금도 훌륭한 전략의 사례로 많이 인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 혁신적인 전략을 질레트가 최초로 시작한 것은 맞지만 질레트는 원래 이 전략을 시행할 생각이 없었다.

질레트의 창업자 킹 캠프 질레트는 현재 일반적인 병뚜껑으로 쓰이는 크라운캡을 판매하는 영업사원이었다. 병은 회수되어 재활용되는데 크라운캡은 소모품으로 버려지기 때문에 크라운캡은 영원히 돈을 벌 수 있는 모델이었다. 질레트는 바로 이 병과 크라운캡의 관계에서 착안하여 면도날을 교체할 수 있는 면도기를 구상하고 1904년에 특허를 얻어 판매에 돌입했다. 질레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면도기는 이발소나 바버숍에서 볼 수 있는 접이식 직선 면도기로 마치 식칼처럼 정기적으로 날을 갈아줘야 했다. 하지만 이 면도날 갈기는 개인이 하기엔 어렵고 번거로워서 따로 날을 갈아주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질레트의 새로운 면도기는 면도날을 갈 기술이 없는 개인이라도 언제나 잘 갈려진 면도날을 쓸 수 있다는 점을 장점으로 소비자들에게 내세운 것이다.

그렇다면 질레트는 이때 그 유명한 '면도기-면도날' 모델을 사용하여 소비자들에게 싼값에 면도기를 팔고 대신 비싼 면도날로 수익을 냈을까? 기록상으론 정반대다. 당시 질레트는 면도기와 교체용 면도날이 든 세트는 5달러, 12개의 면도날이 든 카트리지는 1달러에 판매했다. 면도기에 비싼 가격을 매기고 교체용 면도날은 싼 가격에 파는, 우리가 아는 '면도기-면도날' 모델과 정반대의 가격 전략을 사용한 것이다. 이는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있다. 면도날을 비싸게 판다면 사람들은 굳이 질레트의 교체식 면도기를 쓸 게 아니라 그냥 기존의 면도날을 가는 방식을 사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질레트의 면도기가 프리미엄 상품이었단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기존의 직선 면도기는 가격이 1~3달러인데 질레트는 그 두 배에 달하는 5달러로 가격을 책정했다. 당시 미국 근로자의 평균 임금이 60달러였던 것을 생각하면 질레트의 면도기는 지금으로 치자면 20만원대 에어팟에 비교할 수 있을 정도의 가격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질레트의 면도기는 애초부터 소득이 높은 사람들을 타기팅한 상품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사람을 시켜 면도날을 갈 수 있기 때문에 면도날을 비싸게 팔아선 안 된다. 그 대신 면도날이 교체 가능한 신기한 상품임을 어필해야 하고 그러려면 상품의 핵심은 면도날이 아니라 면도기 그 자체가 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초기에 질레트는 면도기를 더 비싸게 팔고 면도날은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판매했던 것이다.

질레트가 이러한 전략을 바꿔 지금의 '면도기-면도날' 모델을 채택한 것은 타의에 의해서다. 1921년 질레트의 특허가 만료되면서 경쟁사들도 질레트처럼 교체식 면도날을 채택한 면도기를 저렴하게 출시하기 시작했다. 질레트는 이 가격 경쟁에 대응하기 위해 새로운 특허를 채택한 면도기를 기존과 같은 5달러에 판매하면서 구형 면도기의 이름을 브라우니로 지어 경쟁사보다 더 저렴한 가격인 1달러에 판매한다. 그리고 가장 큰 경쟁사인 오토스트롭이 질레트의 면도기와 호환이 가능하지만 반대로 질레트의 면도날은 호환되지 않는 면도날과 면도기를 출시하자 이 회사를 인수함으로써 이 시도를 차단해버린다. 경쟁사의 위협이 거세지자 질레트는 면도날 판매를 위해 자사의 면도날을 쓰지 않으면 제대로 된 면도를 경험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를 기점으로 질레트는 면도날을 파는 회사가 된 것이다. 비즈니스 역사상 가장 훌륭한 사업모델은 이렇게 의도치 않게 탄생했다.

[김영준 '골목의 전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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