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작가 9인이 그린 ‘단절’ 그리고 연대[책과 삶]

김종목 기자 2022. 12. 2.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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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연은 우리가 휩쓸려 살아가는 이 시대를 잘 압축해 표현한 단어”
소설집 <절연>에 참여한 작가들. | 문학동네, 문예춘추 제공

절연

정세랑 외 지음 | 문학동네 | 412쪽 | 1만7000원

“딸애가 장래에 ‘무(無)’가 되고 싶대서. 난처하네요.” 2016년 <편의점 인간>으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무라타 사야카의 단편 ‘무’는 이렇게 시작한다. ‘안정 지향 심플 세대’, ‘과소비 쾌락 세대’가 존재한다. ‘나’는 ‘리치 내추럴 세대’라 여긴다. ‘무 되기’는 해외에서 유행하는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이다.

가족관계는 단절됐다. 딸은 ‘무’가 되려고 집을 나간다. 남편은 스마트폰 속에서 살다시피 한다. 절연(絶緣) 배경은 ‘나’의 독백에서 짐작할 수 있다. “노후를 위한 가축. 그것이 딸이었다. 막상 낳고 보니 내가 가축이었다. 남편에게 나는 오래되고 더럽기는 해도 성욕 처리가 가능하며, 가만히 두면 집안일을 해주는 피와 살을 지닌 도구였다. 딸은 나를 이용해 성욕을 처리하는 일은 없지만, 아무리 성장해도 당연하다는 얼굴로 나를 계속 부려먹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미래에는 딸이 우리의 도구가 된다.”

딸은 무가 되려면, 가족 정도는 우선 잊어야 한다. 딸에겐 망각의 시작인 동시에 망실의 터다.

<절연>은 아시아 작가 9인의 단편소설집이다. 프로젝트 기획자 정세랑은 “우리가 휩쓸려 살아가는 이 시대를 잘 압축해 표현할 수 있는 단어”로 ‘절연’을 떠올렸다고 한다. 이미 발표했거나 새로 쓴 작품을 모았다. 9편이 각각 단절된 건 아니다. 소재나 내용은 이어진다.

무라타 사야카의 ‘무’엔 연애 감정, 고독감 같은 ‘감정 전파’를 흘려보내는 ‘도쿄타워’가 등장한다. 타워 지하실에선 경제발전, 개체 수를 계산해 감정을 만들어 전파한다. 주인공은 “왜 도쿄타워는, 내게 ‘모성’을 송출해주지 않았을까”를 생각한다.

휴고상 수상자 하오징팡의 ‘긍정 벽돌’도 ‘감정’을 소재로 한다. 소설 배경은 ‘긍정 시티’다. 이곳에선 즐거움, 행복 같은 긍정적인 감정만 표출해야 한다. 슬픔, 괴로움, 두려움, 분노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면 붙잡힌 뒤 격리된다.

주인공 저우춰는 ‘긍정 멘털 테라피스트’로 일한다. 거리나 방송국에서 즐겁고 유쾌한 장면을 선보이며 시민들을 기쁘게 하는 게 일이다. 디렉터 조카가 낙하산으로 자기 자리를 채간 사실을 안 뒤 부정적 감정이 정상 한계치를 넘어선다. 하오징팡은 작가의 말에서 “문제는 현실이 상상처럼 멋지지 않아서가 아니다. 외려 현실이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문제”라고 했다. 그는 “희로애락은 하나하나가 생활의 일부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슬픔, 고통, 아픔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공존하는 것이 인생 아닐까”라고 했다.

‘혁명적 낙관주의’나 “긍정 에너지를 전달하는 작품이야말로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는 문학이라 여기고 대다수 작품이 지니는 슬픔과 분노, 야유, 고통 같은 기조를 이해하지” 못하는 중국 현실에 대한 비판이 깔렸다. 그는 소설을 두고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어떻게 자기 안에 있는 모든 빛과 그림자를 통합해 완전함을 지닌 인간이 될 것인지 물을 뿐”이라고 했다.

‘무’처럼 가족 절연을 다룬 게 베트남 작가 응우옌 웅옥뚜의 ‘도피’다. 아들 결혼식 때 “지금부터 남남이다”며 연을 끊자고 나선 주인공 어머니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책임, 종속, 의존, 구속이 늘 애정과 공존”하는데, 신산한 삶에서 이 관계를 끊어내려 하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도 떠올린다. “아내에게 읽어줄 조사를 한 글자씩 궁리하노라면 인생이란 이리 짧은 문장 속에 담기는가 싶어 복받치는 심정 또한 그는 억눌러야 할 것이다.”

알피안 사아트의 ‘아내’는 다른 여자와 남편을 공유하는 여자를 일컫는 ‘마두’를 다룬다. 40대 초반 사우다는 남편 아드리스의 한때 연인이었던 아이샤에게 마두, 즉 두 번째 아내가 되길 청하며 이렇게 말한다. “우린 언제나 남자들에게 결정권을 주고 따를 뿐이잖아요. 하나쯤 우리가 결정해도 되지 않겠어요?” 그는 “두 번째 연인이 첫 번째 아내가 된다. 첫 번째 연인이 두 번째 아내가 된다. 그 대칭성 위에서 언젠가 여성 동지들의 친밀한 얽힘이 숙성되리라”고 여겼다. “한 편의 연극 같은 가족 드라마의 섬세한 심리묘사”를 축으로 전개하는 이야기엔 싱가포르 내 말레이인 사회의 절연과 단절을 다룬다. 사아트는 마이너리티도 의사가 될 수 있다는 걸 증명하려고 명문 남학교 래플스주니어 칼리지에 들어간다. 하지만 싱가포르 국립대학 의학부에 진학한 뒤 졸업하지 않고 작가의 길을 선택했다. 다양한 말레이인의 현재를 그린 작품 중 하나가 ‘아내’다.

작품집은 아시아의 여러 현실을 조명한다. 태국 작가 위왓 럿위왓웡사의 ‘불사르다’는 태국의 왕정 비판과 민주화 운동, 홍콩의 우산혁명 등을 배경으로 한다. 5개 장의 주인공 5명의 관계는 사건 속에서 이어지거나 단절된다. 한 태국인 주인공은 연인 관계를 맺은 홍콩인의 시위를 멀리서 응원하며 “식민지화된 역사에서 태어난 해방의 꿈”을 떠올린다. “승산 없는 투쟁으로 나아가는 젊은 투사. 그에게 일어날 수 있는 유일한 승리는 승리가 아니라 투쟁 자체”라고 생각한다. 소설 구상은 이창동의 <버닝>에서 비롯됐다. 2020년 이후 태국에서 확산한 민주화 운동도 다루는 이 소설은 태국 배우이자 민주주의 활동가 인티라 차로엔푸라에게 바치는 것이기도 하다.

“도시의 뱃속에 도사렸던 짐승이 민낯을 드러냈다.” 홍라이추가 ‘비밀경찰’에서 중국의 억압 아래 놓인 홍콩 상황을 압축해 표현한 문장이다. “사람들은 두려움을 묘사하다가 두려움을 믿게 되었고, 그러는 사이 북쪽에서 온 비밀경찰이 소리도 없이 진주해 도시를 장악했다.” 탄압과 억압의 도시에서 고양이를 기르는 사람들은 도시 한 귀퉁이에서 촛불을 들고 모이며 저항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를 다룬다.

대만 작가 롄밍웨이의 ‘애프터눈 티’는 대만과 외교 관계를 유지하는 국가 중 하나인 카리브해의 섬나라 세인트루시아를 배경으로 한다. 농업기술단 아버지를 따라온 중학생 슈리는 흑인 친구 앤더, 흑인 어머니와 백인 아버지를 둔 이슈마일과 친구를 맺는다. 탁구 선수들이기도 한 아이들은 경쟁하고 갈등한다. 대만과 대만인의 정체성은 위협받는다. 슈리는 “중국으로 가버리라고” “하루 세 끼 개고기 먹는 거 아니냐” “노란 아시아 원숭이들” 같은 말을 듣는다. 세인트루시아는 언제든 대만과 단교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대화 주제 중 하나다. 인종 문제와 국제 정치 이슈 와중에 아이들은 서로를 이해하며 성장한다.

책은 정세랑과 무라타의 대담을 부록으로 실었다. 두 사람이 공통으로 꼽은 작품이 티베트 출신 작가 라샴자의 ‘구덩이 속에는 설련화가 피어 있다’이다. 중국으로 가서 일하는 티베트 출신 이주노동자의 저임금 같은 현실을 묘사한다. 게으른 남편에다 살림과 육아 등 온갖 노동을 도맡은 주인공 친구 이야기도 한 줄기다. 이 친구는 동충하초를 캐러 트럭을 타고 가다 교통사고로 죽는다.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죽음의 어둠에 삼켜지는 광경을 떠올렸다. 숨을 거두는 순간 그 애는 어둠 속에 핀 설련화를 보았을까.” ‘설련화’는 히말라야에서 티베트 고원에 이르는 지역에서 자라는 국화과 취나물속 고산식물이다. 티베트어로 ‘메토 칸라’인데, 메토는 꽃, 칸라는 설산의 신이라는 뜻이다. 고향 사람들이 봄엔 동충하초를 캐고, 여름과 가을엔 도시 건축 현장에서 일하는 현실이 이 죽음에 녹았다. ‘구덩이 속 설련화’는 진학이나 취업 때문에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일하는 티베트 젊은이들의 불안정한 현실과 절망에 깃든 구원을 은유한다.

마지막 작품은 정세랑의 ‘절연’이다. 가은이 자신을 폭력적인 남자친구에게서 구해준 선정, 형우와 맺는 우정과 절연을 다룬다. 방송작가 가은은 이 두 사람이 성추문을 일으킨 방송국 직원의 복귀를 도운 사실을 알고는 혼란에 빠진다. 정세랑은 대담에서 작품 구상 계기를 두고 “문화계에서 문제를 일으킨 인물들이 복귀할 때 반복되는 패턴이 보여 그 패턴에 대해 쓰고 싶었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신뢰를 얻으려면 험난한 과정을 거치고, 어떤 사람은 아주 쉽게 공감과 동정, 기회를 얻는다. “사람들의 마음이 흐르는 통로가 뒤틀려 있다는 것에 대해 써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소설집 주제는 절연이지만, 기획이나 작품 내용, 지향은 결국 ‘결연’과 ‘연대’로 이어진다. 아시아 문학의 높은 수준도 확인할 수 있다. 작품마다 해설과 작가의 말을 붙였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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