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굽는 타자기] 억압의 시대, 권력 앞에도 당당했던 여성의 목소리

김철현 2022. 12. 2.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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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정의 문장들
상언에서 독자 투고까지, 여성들의 목소리를 찾아서

"사람됨이 특히 모자라고 행동이 경솔하고 무례하며 가난한 선비를 능멸하고 사람들을 무시한다." 누군가에 대한 비판, 날이 서 있다. 이어지는 말은 더욱 가차없다. "지각이 없어 소견이 어둡고 생각이 막혀 있으니 밥 부대일 뿐"이란다. 밥이나 축낼 뿐인 이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까, 삭탈관직해 시골에 보내 10년간 성현의 글만 읽도록 하면 좋겠다고 한다. 요샛말로 ‘저격’, 당한 이는 누구이며 시위를 당긴 이는 누구일까. 이 글은 19세기 후반 기생 출신인 ‘초월’이 썼다. 대상은 남편인 심희순, 그는 우의정을 지낸 심상규의 손자다. 기생 출신 첩이 재상의 손자인 남편에게 쏟아낸 서슬 퍼런 비판은 개인적인 불만의 토로가 아닌, 상소문이다. 19세기 후반이라지만 신분제와 가부장제가 견고한 조선 사회에서 숨죽여 살았을 것이라 여겼던 여성의 목소리는 우리의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깨뜨린다. 김경미 이화여대 이화인문과학원 교수가 쓴 ‘격정의 문장들’은 17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격동의 시대에 권력 앞에서도 당당했던 이 같은 여성들의 글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한국 고전문학을 전공한 김 교수는 조선 시대 여성 생활, 특히 여성의 글과 글쓰기에 관해 일찍부터 관심을 기울여왔다. 이 책은 그간의 연구를 바탕으로 조선 여성들의 좌절과 분노, 열망과 혜안을 보여준다. 다루고 있는 글은 조선 후기 여성들이 올린 ‘상언’부터 근대 계몽기 신문의 독자 투고까지 다양하다. 상언은 조선 시대 백성들이 글로 임금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제도다. 꽹과리를 쳐서 임금에게 하소연하는 ‘격쟁’과 함께 백성들이 자기 사정을 임금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1752년부터 1910년까지 국정 상황을 기록한 ‘일성록’을 대상으로 정조에게 상언하거나 격쟁한 사례들을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총 4427건 중 여성이 제기한 것이 405건이었다. 정조 재위 기간이 25년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한 해 16건의 여성 청원이 이뤄진 셈이다. 이는 전체 상언·격쟁의 10.4%, 이 중 평민층 부녀자가 올린 것이 사족 부녀자의 3배에 달한다. 생애는 물론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여성들이 자신의 처지에 주눅들지 않고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글을 썼다는 데 저자는 주목한다. 이 문제는 결국 개인의 사정에 머물지 않고 사회의 문제와 연결된다.

다시 초월의 상소문을 보면, 남편 심희순의 문제에서 시작한 글은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적폐를 고발한다. 초월은 도적 같은 관리들이 가득한 조정과 벼슬을 돈으로 사고파는 세태에 대해 지적하고 곡식을 비축했다 흉년이면 백성들이 빌려 먹고 갚게 하는 환곡의 문제와 세금 문제도 다룬다. 이런 의식은 19세기 말부터 여성들이 신문이라는 공론의 장을 통해 세계를 학습하고 독자 투고를 통해 생각을 펼치게 되면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주요 주제 중 하나는 여성 교육의 중요성, 1898년 ‘북촌의 여중군자’ 몇 명은 여학교의 필요성과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여학교설시통문’을 내면서 "혹시라도 이목구비와 사지오관육체가 남녀가 다름이 있습니까? 어찌하여 병신 모양으로 사나이가 벌어 주는 것만 앉아 먹고 평생을 깊은 규방에 처하여 남의 절제만 받으리오?"라고 여성들의 각성을 촉구한다. 이 통문은 황성신문 별보와 독립신문에 게재됐으며 발기인들은 최초의 여성단체인 ‘찬양회’를 결성했다. 1906년 5월 황성신문에 ‘신낭자’라고만 밝힌 여성이 투고한 글도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학교가 있는데 여학교가 없으면 어찌 교육의 근본을 알겠는가?"

이들의 목소리는 지금의 페미니즘과 그다지 멀지 않으며 페미니스트 운동을 역사적 맥락에서 보게 해준다고 저자는 평가했다. 1908년 8월 1일 자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김송재의 글 끝머리는 "대한제국이 천하에 문명국 되게 함을 남자에게만 맡겨 두지 아니함이 우리 여자의 의무일까 하노라"라고 했다. 100년 전의 글이지만 여전히 유의미하다.

격정의 문장들 | 김경미 지음 | 푸른역사 | 308쪽 | 1만8000원

김철현 기자 kc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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