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쿨파]장쩌민이 제2의 천안문 일으킨다고? 서방의 희망일뿐

박형기 기자 2022. 12. 2.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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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 백혈병 등으로 상하이에서 치료를 받다 향년 96세로 별세했다. ⓒ AFP=뉴스1 ⓒ News1 우동명

(서울=뉴스1) 박형기 기자 =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 사망이 제2의 천안문 사건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블룸버그통신이 1일(현지시간) 보도하는 등 서방의 언론이 잇달아 이 같은 전망을 내놓고 있다.

서방 언론은 1989년 천안문 사건의 도화선이 중국 공산당 개혁파의 거두 후야오방의 죽음이었다며 이 같이 전망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서방언론의 희망사항일 뿐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중국 대륙에서 민주화 요구가 점증하고 있던 1989년 4월 8일 중남해에서 소집된 공산당 중앙정치국회의에 참가한 후야오방이 갑자기 쓰러졌다. 그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4월 15일 사망했다. 심장마비였다.

덩샤오핑과 후야오방(우). 1981년 사진이다. - 바이두 갈무리

앞서 후야오방은 1987년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1차 천안문 시위)로 인해 공산당 총서기직에서 물러났기 때문에 억울하게 숙청되었다고 중국인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연민의 정을 자아냈다. 베이징의 대학생들은 중공 중앙이 후야오방에게 공정한 평가를 내릴 것을 요구하며 천안문 광장에 모여들었다. 그렇게 시작됐던 시위가 고르바초프 방중을 계기로 전면적인 민주화 시위로 발전했다.

후야오방은 이른바 소홍귀(小紅鬼, 소년병)로 덩샤오핑과 같이 대장정에 참여한 혁명 1세대다. 그는 덩에게 “후배들을 위해 같이 물러나자”고 말할 정도로 덩 앞에서도 전혀 꿇리지 않는 1세대 혁명 영웅이었다.

그런 그의 실각은 중국 인민의 연민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그러나 장쩌민은 다르다. 장쩌민은 인민의 연민을 자아낼 요소가 거의 없다.

그는 행운아였다. 후야오방이 실각한 이후 덩샤오핑의 후계자는 자오쯔양 당시 총리였다. 그는 실용주의 노선을 펼쳐 확고부동한 덩의 후계자로 자리매김했었다.

당시 강경파의 좌장이 리펑이었고, 온건파의 좌장이 자오쯔양이었다. 덩샤오핑은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정권의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보고 강경파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후 리펑 일파는 무자비하게 천안문 시위를 진압했다.

강경파에게 밀린 자오쯔양은 천안문에 있는 학생들을 찾아가 “내가 너무 늦게 왔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천안문 사건 당시 천안문에 간 자오쯔양. 오른쪽에 원자바오 전총리의 젊은시절 모습도 보인다. - 바이두 갈무리

이는 덩을 결정적으로 분노케 했고, 이 사건으로 자오쯔양은 후계자 대열에서 완전히 탈락했다.

이 때 덩의 눈에 띈 인물이 장쩌민이었다. 당시 장쩌민은 상하이시 당서기를 맡고 있었다. 그는 천안문 사건 기간에 상하이에 계엄령을 내리는 등 상하이를 잘 단속해 덩에게 점수를 땄다.

그는 중앙무대 경험이 전혀 없어 집권 초기 베이징 권부에서 ‘상하이 촌놈’ 취급을 받았었다.

그는 중국을 방문한 미국 외교사절 앞에서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을 수분 동안 장황하게 암송하는 등 실수를 남발했다. 오죽했으면 미국의 유력지 뉴욕타임스(NYT)가 그의 사망 직후 부고 기사에서 “매우 수다스러운 지도자였다”고 평가했을까?

집권 초기 그의 리더십은 매우 취약했지만 덩샤오핑이 오랫동안 살아줌으로써(1997년 사망) 그는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다.

외신들은 그가 덩의 유훈을 이어받아 중국을 발전도상에 올려놓았다고 업적을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이도 말대접일 뿐이다. 덩은 장쩌민의 집권후반기까지 살았었다. 엄밀히 말하면 덩의 업적이지 장쩌민의 업적이 아니다.

장쩌민이 국가 주석을 맡고 있을 때도 외국 정상들은 장쩌민이 아니라 덩을 만나고 싶어 했다. 일부 외국 정상들은 중국에 와 덩을 만나지 못하면 정상회담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1990년 중국을 방문한 일본 자민당의 막후 실력자 가네마루 신이 덩샤오핑을 만나게 해달라고 떼를 쓰자 중국이 같은 덩씨인 덩잉차오(저우언라이의 부인)을 내보낸 것은 매우 유명한 일화다.

장쩌민은 사실상 덩의 꼭두각시였던 것이다. 그는 2002년 후진타오에게 권력을 물려주고 현역에서 은퇴했다. 은퇴 이후 그는 상하방의 좌장으로 정계에 나름대로 영향력을 행사하다 96세까지 장수했다.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이 후임인 후진타오 당시 신임 국가주석. 2003.03.15 ⓒ 로이터=뉴스1 ⓒ News1 권진영 기자

이런 그에게 중국 인민들이 연민의 정을 느낄 수 있을까? 그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할 수 있을까? 물론 그의 죽음이 계기가 돼 중국인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는 있을 터이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도 크지 않아 보인다. 중국의 반 ‘제로 코로나’ 시위는 지난달 27일 중국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그러나 이후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다.

28일 중국 베이징에서 정부의 고강도 제로 코로나19 봉쇄 정책에 항의하고 우루무치 화재 희생자를 추모하는 주민이 “봉쇄 해제하라” “시진핑 물러나라” 는 구호를 외치며 밤샘 시위를 하고 있다. ⓒ AFP=뉴스1 ⓒ News1 우동명 기자

중국 당국이 제로 코로나 완화 조치를 재빠르게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베이징은 증상이 경미한 환자의 경우, 자가 격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코로나 관련 조치를 속속 완화하고 있다.

반 제로 코로나 시위가 막 발생했을 때, 영국의 가디언은 "중국인들이 불합리한 코로나 조치에 인내심을 잃어 일시에 분노를 표출했다"며 "시위가 조직화돼 있지 않아 정부를 전복할 정도는 아니다"고 분석했다.

가디언은 "그렇지 않아도 코로나 규제를 완화하려는 정부가 방역 정책을 합리적으로 조정하면 시위대는 이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이에 따라 중국의 코로나 시위는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날 가능성이 커 보인다.

물론 이번 주말을 지켜봐야 한다. 이번 주말에 또 다시 코로나 시위가 발생할 수도 있다. 설령 시위가 다시 발생한다고 해도 장쩌민의 사망이 기폭제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sinopark@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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