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것 아닌 세상, 옥순봉
충청북도 제천의 옥순봉과 충주호에 다녀왔다. 가을물이 쏙 빠진 기암괴봉은 그 어느 계절보다 아름다웠다. 산은 산이요 봉우리는 봉우리도다. 산 본래의 모습을 100% 간직하고 있는 가은산 등 일대의 산들은 더 이상의 완벽한 수묵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림 같은 자태를 묵묵히 보여주고 있었다.
해발 286m 옥순봉을 오르는 길은 동네 뒷산 오르는 정도의 경사도를 유지하고 있다. 심지어 어떤 중간 봉우리에서는 오르막보다 내리막이 길어서 이게 등산을 하는 것인지 하산을 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룰루랄라 걸을 수 있었다. 물론 이 기쁨은 옥순봉 정상과 전망대에서 꿈결 같은 순간을 즐기고 내려가던 하산길이 모두 앗아갔다. 내리막이어야 할 하산길에서 낑낑거리며 오르락내리락 등산과 하산을 반복하자니 오죽했을까.
필자 일행은 이날 등산을 조금 늦게 시작했다. 이유는 오직 해질녘 광선 하나 때문이었다. 황금빛으로 떨어지는 광선이 심신을 황홀하게 만들어주는 시간을 만나기 위해서다. 일기예보를 들을 땐 전국적으로 그다지 쾌청한 날씨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옥순봉에 오르는 우리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었다. 그 ‘청청청’에 황금빛 광선이 들어오니 그 황홀경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본격적인 풍경 애기로 들어가기 전 ‘매우 중요한’ 정보를 하나 전하고자 한다.
어찌어찌 이정표를 따라 오르고 또 오르면 결국 옥순봉 정상에 도달하게 된다. 해발286m 정상석 앞에 서면 저만치 아래로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전망을 보면 볼수록 무언가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니, 고작 이 정도 전망을 보겠다고 여기까지 올라온 건가? 투덜대고 있다면 그것은 당신의 관찰력이 부족한 탓일 수 있다.
난간 한 쪽에 붙어있는 ‘0.1km 옥순봉전망대’. 이 이정표를 보지 못하고 그대로 하산을 한다면 그날의 옥순봉 등산은 어처구니없는 허당이 될 게 확실하다. 옥순봉 정상과 옥순봉 전망대는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지만(서로 보이지는 않는다) 모든 게 다른 지점이다. 이 전망대를 만든 사람이 누군지 궁금할 정도로 ‘옥순봉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충주호의 모습은 어여쁜 풍경화 그 자체이다. 그 결과 또 하나 궁금해지는 대목은 “도대체 왜 ‘0.1km 옥순봉전망대’ 이정표를 옥순봉 정상석 바로 옆에 큼직하게 붙여주지 않고 조금 떨어진 곳에 붙여놓음으로써 자칫 백만 불짜리 풍경을 보지 못하고 하산할 수도 있는 상황을 만들었을까”였다.
옥순봉 전망대에서 충주호를 구경하고 멍 때리는 시간을 갖고 사진 삼매에 빠져들면서, 뜬금없는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어차피 옥순봉 등산은 고난도 행군이 필요한 곳은 아니다 보니 옥순봉처럼 전망이 예쁜 봉우리 여행은 가능하다면 커플 여행을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사진을 찍고 놀다 전망대 난간 아래에 앉아(난간이 있어서 안전하다. 단, 고소공포증이 있는 경우 괄약근이 고생깨나 할 수도 있다) 앉아있노라니 마음이 차분해지고 인생의 거리가 길고 멀게 느껴졌다. 얼마 만에 가져보는 느긋한 시간이란 말인가. 하지만 산에서의 시간은 지상에서의 시간보다 훨씬 빨리 흘러간다. 옥순봉도 예외는 아니었다. 광선도 사라지고 남은 밝음도 소멸되는 데 채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하산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사실 이렇게 ‘등산처럼 느껴지는’ 하산길은 실로 오랜만의 경험이었다. 산길은 완전히 깜깜해져 스마트폰 조명을 켜고 탐방로를 놓치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이제 내려가는 일만 남았는가 싶으면 또 멀리 중간 봉우리를 향해 올라야 했고, 이게 마지막이겠지 긴장을 풀면 또 다시 오르막이 시작되는…. 백만 불짜리 풍경이 어디서 공짜로 나온다더냐! 스스로 위로하며 끝내 출발했던 지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조사를 해 본 것은 아니지만 제천은 대규모 한우 농장이 귀해 보였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고깃집의 메뉴가 주로 떡갈비였고, 지글지글 구워 먹을 수 있는 메뉴는 쉽게 보이지 않았다. 열심히 길을 달려 정통 한우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집에서 출발할 즈음 대충 먹은 아침 식사가 전부였던 일행은 그간의 허기를 화끈하게 달래고자 한우계의 신사 안창살과 갈비살을 잔뜩 시켜서는 전의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푸짐한 고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러오는 느낌이었지만, 과연 저것들을 다 먹을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며 굽기와 먹기를 시작했다. 시장끼와 상관없이 고기는 부드럽고 맛있었으며 함께 나온 반찬들도 직접 만든 듯 성의 있는 맛이었다. 이 지역의 한우 전문점들은 ‘한우판매점 인증제’를 실시하고 있는데, 한우 공인을 받은 고기만 판매하고 있어서 마음 편안하게 먹을 수 있었다. 이날 찾은 한우집에선 한우불고기전골(1만2000원/2인 이상), 한우육사시미(4만 원), 한우육회(3만 원) 등을 지정된 가격에 맛볼 수 있었고 안창살, 채끝살 등 특별한 부위는 당일 시세에 따라 가격이 다소 유동적이다.
(Info ‘청풍호청정한우’ 충북 제천시 금성면 청훙호로 743(월림리) / 운영 시간 09:00~22:00)
구름 속 사색의 공간 ‘정방사’
옥순봉은 산세가 만만치 않는 바위산을 이루고 있는데, 21세기 시선을 볼 때 이름이 상대적으로 유순한 게 특징이다. ‘옥순’이라는 이름은 퇴계 이황이 지었다. 어느날 충주 근처 청풍을 다녀오던 길에 일행들이 옥순봉을 가리키며 ‘어울리는 이름 하나 만들어 달라’ 청하자, 이황이 ‘거칠게 분출한 바위들이 마치 활기차게 올라오는 대나무 죽순과 같다’ 하며 ‘옥순봉’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옥순봉을 정적인 바위 봉우리가 아닌 살아 움직이는 역동적 존재로 퇴계 이황은 바라보았던 것이다. 한편으론 김홍도가 그린 옥순봉은 주변의 봉우리들에 비해 다소 과장되게 그린 느낌이다. 시선에 따라서는 너무 우뚝하고 미끈하게 그린 감이 없지 않다.
충주호는 충주댐 담수호이다. 그러나 이름은 두 가지로 불리고 있다. 충주시에 가까운 호수는 ‘충추호’로, 청풍면에 속한 지역에서는 ‘청풍호’라 부른다. 청풍호가 있는 절벽 중턱에 정방사라는 사찰이 하나 있다. 산골 지방을 여행하며 절 구경을 빼놓을 수 있나. 다음날 눈을 뜨자마자 정방사를 향해 달려갔다. 국립공원 월악산과 청풍호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정방사는 신라시대 문무왕 때 의상대사(추정)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법주사에 소속된 말사이다. 꽤 가파른 임도를 따라 승용차로 접근,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20~30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정방사 마당에 당도할 수 있다. 헉헉거리는 숨을 고르며 대웅전(원통보전)을 바라보니, 사찰이 가람 한 채가 아닌, 자연과 하나가 되어 붙어있는 바위처럼 느껴졌다. 납작한 원통보전 뒤로는 주상절리가 있고, 그 바위 꼭대기에는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말벌집 하나가 동그랗게 매달려 있다. 자연꿀 채집가가 보면 군침을 흘리겠지만, 실제 모습을 보면 채집은 생각할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바위는 험하고 거친 편이다. 주상절리를 이루고 있는 바위는 ‘의상대’라 불리는데, 진짜로 저 바위가 부처님을 위해 오랜 세월 지각 운동을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곳의 바위와 사찰은 하나의 자연으로 뭉쳐 있는 느낌이었다.
의상대 아래 쪽은 석굴이 형성되어 있다. 바위를 타고 떨어지는 감로수 맛이 아주 좋다고 전해지지만, 코로나 팬데믹 이후 현재 음료는 불가하다. 폭이 좁은 절벽에 위치한 사찰인 만큼 가람이 많지는 않다. 대웅전 옆 해수관음상과 오층석탑, 지장전, 산신각 정도가 전부다. 우리가 올랐을 때는 물안개가 환상적으로 피어올라 산 정상 정도만 보일 정도였으니, 아쉽게도 청풍호 조망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정방사는 산책할 숲길도 변변하게 조성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벤치에 앉아 있노라니 명상 욕구가 일어난다. 잠시 이곳에서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유람선을 빼놓을 순 없지
유람선은 청풍호(충주호) 청풍나루에서 뱃머리를 돌렸다. 이곳에서 청풍 지역의 문화와 자연을 즐길 사람들은 우르르 하차했고, 다시 충주호(청풍호) 장회나루로 돌아갈 사람들은 승선을 시작했다. 유람선 운행 시간은 한 시간 반 정도 소요된다. ‘유람선’하면 밋밋하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곳의 유람선은 절대적으로 한번은 경험해봐야 할 한반도 최고의 풍경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언제 또 다시 이런 물, 산, 하늘 아래에서 흥얼흥얼 콧노래 부르며 뱃놀이를 할 수 있겠나.
글 이영근 사진 안동수(다큐PD)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57호 (22.12.06)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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