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나의 영원한 매니저 유현목 감독님
강석우 영화배우
모든 게 어색하던 신인배우 시절
영화 관계자 만나도 혼자서 쩔쩔
대학 은사이신 감독님이 나서서
‘여수’ 출연 부탁해 어렵게 데뷔
당신은 처음이자 마지막 매니저
제자 향한 사랑에 늦게나마 감사
요즘은 연기를 처음 시작하는 젊은 친구들도 대부분 기획사에 먼저 들어가서 매니저와 함께 일을 시작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연기를 시작하던 당시 TV 탤런트들은 매니저가 없었고 영화 출연도 같이하는 연기자는 더러 매니저가 있었다. 돌아보니 매니저 없이 40년 넘게 배우 생활을 해 오는 동안 참 힘든 일도 많았다.
스물두 살에 배우 선발에서 1등으로 뽑혀 그해 여름 끝 무렵 내 이름 앞에 붙은 신인 배우라는 타이틀. 그러자 영화사·신문사·잡지사·방송사 등 여러 곳에서 얼굴 좀 보자는 데가 많았다. 아직은 그저 동네 청년인데 혼자 안 맞는 옷을 입은 어색함으로 여러 곳을 다녔다. 매니저가 있어서 영화사나 ‘다방 미팅’에 동행해 주었더라면 얼마나 마음이 편했을까. 언제나 혈혈단신 적진에 뛰어드는 ‘단기필마’ 기분이었다. 실감 나게 표현하면 말을 탄 당당한 병사인 적도 있었지만, 대개는 그냥 터덜터덜 먼 길 걸어 도착한 지친 병사의 기분이었다.
배우라는 이름을 달고는 나갔지만 20대 초반의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대학생이 낯선 곳에서 낯선 아저씨(?)들과 낯선 일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적응이 안 돼 무척 힘이 들었다. 관찰당하는 입장으로 사람을 만난다는 건 참으로 피곤하고 지치는 일이다. 우선, 충무로의 다방은 내가 드나들던 몇몇 다방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약속 시간에 맞춰 다방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가면, 한복을 입고 곱게 단장한 다방 마담이 “얜 또 뭐야, 배우 지망생인가?” 힐끗 쳐다보고는 “어머, 감독님∼” 하고 누군가에게 반색할 뿐. ‘다방은 대개 사장님∼ 하던데….’ 이방인 취급하는 그것부터 약간 주눅 든 나는 영화에서 본 적이 있는 알 만한 얼굴들과 담배 연기가 뒤섞인 다방에서 만날 사람이 먼저 손을 들지 않으면 그냥 어색하게 서 있어야 하는 그 짧은 시간이 싫었다. 손들어 표하는 사람이 없으면 다방에 앉아 있는 것보다 얼른 밖으로 나와서 문 앞을 서성이는 게 마음 편한 ‘소문자 a형’의 인간이었으므로 그때가 매니저가 있었으면 좋았을 순간이었다.
세상 경험 짧디짧은 대학생 혼자서 노련한 영화 관계자들을 만나 쩔쩔매는 내 모습은 누가 봐도 안쓰러웠을 것이다. 수줍음도 꽤 많아 걸핏하면 고개를 푹 숙이곤 했다. 그러다 눈에 익은 배우들이 들락거리면 나도 모르게 눈동자가 돌아가는 산만함 탓에 ‘미팅’은 고사하고 소통이 거의 안 되어서 통역(?)이 있어야 할 지경이었다. 그때도 매니저가 필요했다. 배우 선발에서 뽑히고 나서 한두 달 사이 거의 모든 영화사에 인사를 다녔고, 많은 미팅을 하면서 당장 영화에 출연할 듯한 분위기였다. 그런데 생각보다 첫 출연의 시간은 더디게 왔다. 들떴던 몸과 마음은 다시 캠퍼스로 돌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의 은사이신 유현목 감독님께서 점심시간에 어딜 가자며 빨리 차에 타라 하신다. 충무로 어느 영화사 건물로 들어가더니 금세 나오셔서는 난감한 표정으로 길거리에 서서 담배를 태우며 생각에 빠진 감독님. 그리고 그 옆에 담배 연기도 피하지 못하고 서 있는 나.
드디어 결단을 내리셨는지 흐트러진 머리카락 쓸어 올리며 출사표 던지듯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평창동으로 가자!” 우리가 달려간 곳은 빈소가 차려진, 해 잘 드는 어느 양옥집이었고, 급히 달려간 그곳에서 공손히 예를 표한 대상은 고인이 아니라 쌩쌩하게 살아 있는 영화사 사장님이었다. 점심도 굶고 헤매듯 달려온 자(?)들에게 관심이 별로 많지 않아 보였던 검정 뿔테 안경 너머 그분의 차분한 표정이 또렷하게 남아 있다. 그날 유 감독님께서 그리도 급박한 얼굴로 체면 불고하고, 빈소도 마다하지 않고 급히 달려가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날의 스토리를 이해하게 된 것은, 세월이 수십 년 지난 어느 날 유 감독님의 빈소에 다녀오던 자동차 안에서였다. 윤정희 선배님과 함께한 나의 영화 데뷔작 ‘여수(旅愁)’는 김수용 감독님의 작품이다. 김 감독님과 요즘 말로 ‘절친’이신 나의 스승 유 감독님께서 얼마 전 선발대회에서 뽑힌 제자의 영화 출연을 부탁하셨을 것이다. 당시 잘나가던 젊은 배우도 많은데 굳이 신인을 써서 안게 될 ‘위험 부담’과 ‘그럼 신인은 누가 키우나’ 하는 생각으로 고심하던 중 절친과의 의리도 저버릴 수 없었던 김 감독님께서 마음을 정하시고는 “그럼 영화사 사장님께 그 친구 얼른 선을 보이고 뒷일은 내가” 했는데…. 다음 날 아침 캐스팅 결정을 한다는 고급 정보(?)를 접수한 유 감독님께서 더는 늦으면 안 된다는 절박감에 세상 물정 모르는 제자를 옆구리에 꿰차고는 화급히 달려가 마지막에 슬라이딩하며 터치다운하듯 ‘요 녀석 좀 봐주세요’ 하며 선을 보이신 게 아닐까.
그런 두 분의 나름 치밀한 계획과 작전으로 드디어 김 감독님으로부터 ‘강석우’라는 멋진 예명을 선물 받으며 데뷔하게 된 것이다. 제자 구실 제대로 못 하며 제 잘난 맛에 살던 어느 날 유 감독님의 부음을 들었고, 빈소에서 사모이신 박근자 화백님의 말씀에 나의 태생적 비밀의 문이 열렸다.
“유 감독님이 석우 씨를 얼마나 좋아했는데요. 늘 말씀하셨어요.”
“네? 저를요…!”
상상도 못 한 말씀에 하마터면 “정말요?” 하고 반문할 뻔했다. 유 감독님은 평생 나에게 어떤 공치사나 관심의 사인을 단 한 번도 주지 않으셨다. 그렇다. 그분은 제자를 남자답게, 무겁게 사랑한 분이셨다. 그러나 떠나신 뒤 알면 무슨 소용 있는가! 나는 도대체 왜 이 모양인가.
인생 첫 매니저이자 마지막 매니저님께, 늦었지만 깊이 존경과 감사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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