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싶은 길] 이치를 깨닫는 여정…가야산 소리길

현경숙 입력 2022. 12. 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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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류동 계곡[사진/조보희 기자]

(합천=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경상남도 합천에 있는 가야산 소리길은 가야산 19경 중 16경을 품고 있는, 풍광이 빼어난 길이다. 홍류동 계곡을 따라, 혹은 소나무 숲을 걷다 보면 물소리, 새 소리, 바람 소리가 귀와 가슴을 가득 채운다. 자연과의 교감 속에 세월 가는 소리, 내면의 소리까지 들리는 마음찾기 길이다.

마음 찾기 길

하지만 소리길의 '소리'는 음향(sound)만을 뜻하지 않는다. '소리'의 한자 표기는 '蘇利'(이로운 것을 깨닫는다)이다. 완성된 세계를 향하여 가는 깨달음의 길이라는 의미가 이 이름에 담겨 있다.

불교에서 소리길은 극락으로 가는 길을 뜻한다. 누구든 이 길을 걸으면 잠시나마 세상 시름을 잊고 길 이름에 담긴 뜻을 실감하게 된다.

길은 대장경 테마파크부터 해인사까지 약 7.2㎞이다. 길 끝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팔만대장경이 기다리고 있다. 대장경을 떼어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가야산 소리길은 해인사 소리길이라고도 부른다.

소리길 입구[사진/조보희 기자]

소리길 입구를 지나면 길은 무릉교 탐방지원센터∼칠성대∼홍류문∼농산정∼길상암∼낙화담∼물레방아∼영산교∼해인사 일주문으로 이어진다.

소리길은 탐방지원센터까지 계속되는 마을 길(2㎞), 센터부터 영산교까지 이어지는 홍류동 계곡 길(4㎞), 해인사 길(1.2㎞)로 나눌 수 있다.

마을 길에서는 시골 동네의 목가적 정취를, 홍류동 계곡 길에서는 웅장한 계곡과 청정 자연을 느끼게 된다. 마을과 숲, 계곡을 지나 해인사에 가까워질수록 성지를 향한 순례자처럼 마음은 정갈하고 차분해진다.

길은 국립공원공단과 합천군이 함께 관리해 잘 다듬어져 있으며 가파른 경사의 오르막이나 내리막이 거의 없어 노약자나 어린이도 그리 힘들지 않게 걸을 수 있다.

5개 구간으로 나누어져 있고, 중간에 길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출구들이 있어 전체 코스를 다 걷지 않아도 된다. 2011년 대장경 천년 세계문화축전 때 옛길을 복원해 개통한 소리길을 찾는 탐방객과 관광객은 해인사 방문객을 합해 연간 10만 명 이상이다.

농산정[사진/조보희 기자]

경치가 가장 빼어난 곳은 소리길 4구간인 길상암에서 영산교까지라고 할 수 있다. 낙화담, 물레방아 등을 만날 수 있다. '꽃잎이 떨어지는 연못'이라는 뜻의 낙화담을 내려다보는 바위 절벽은 봄에는 진달래꽃이, 가을에는 꽃보다 붉은 단풍이 곱게 수놓는다.

그러나 절경이라는 단어는 4구간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2구간에서 4구간까지 계속되는 홍류동 계곡 길 전체가 빼어난 경승이다. 천년 노송이 숲을 이루고, 솔숲을 비집고 들어온 활엽수림은 젊은 기상을 뽐낸다.

무엇보다 유난히 희고 웅장한 화강암 바위들이 홍류동 계곡의 위엄을 대변한다. 가야산은 한국 12대 명산 중 하나다. 홍류동은 가야산의 많은 계곡 중 가장 운치가 있다.

계곡 구간을 걸으면서 16경 중 축화천, 무릉교, 칠성대, 농산정 등의 명승을 감상할 수 있었다. 농산정은 신라말의 큰 학자였던 고운 최치원 선생이 은둔해 수도하던 곳에 세워진 정자이다. '농산'(籠山)은 '세상의 시비가 귀에 들릴까 저어하여, 짐짓 흐르는 물소리로 산을 다 막았네(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라는 그의 시에서 따온 이름이다.

단풍이 아름다운 해인사 진입로[사진/조보희 기자]

세계기록유산 '팔만대장경'과 세계문화유산 '장경판전'

소리길은 해인사 일주문에서 끝난다. 길이 끝났다고 해서 해인사를 찾지 않고 발길을 돌릴 탐방객은 없을 것이다. 해인사는 양산 통도사, 순천 송광사와 더불어 한국 불교계의 '3대 사찰'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2개나 품고 있다. 세계기록유산인 팔만대장경과 세계문화유산인 장경판전이다. 현대 한국 불교의 큰 산인 성철스님이 오랫동안 수행하다 열반에 든 곳이기도 하다.

고려 시대 국난극복의 의지를 담아 만든 팔만대장경은 현존하는 세계 대장경 가운데 가장 완벽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부처님의 8만4천 법문을 수록하고 있다. 새겨진 글자는 마치 한 사람이 조각한 것처럼 자체가 균일하고 아름다워 추사 김정희는 "사람이 아니라 신선이 내려와 쓴 것 같다"고 감탄했다.

대장경판은 총 8만1천350판이다. 경판을 모두 쌓으면 높이가 3,200m로 백두산(2,744m)보다 높고 옆으로 나란히 놓으면 길이가 60㎞나 된다.

해인사 대비로전과 대적광전[사진/조보희 기자]

장경판전은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목조 건물이다. 내부 온도, 습도 조절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설계돼 있다. 건물 앞면과 뒷면에 있는, 크기가 다른 창살을 통해 들어온 바람이 건물 내부 전체에 골고루 퍼진 뒤 밖으로 빠져나가는 구조이다.

내부 바닥에는 황토, 강석회, 숯, 소금이 차례로 다져져 있어 나무로 된 대장경판을 보관하는 데 필요한 최적의 온도, 습도를 유지할 수 있다.

장경판전은 15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해인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나무로 돼 썩기 쉬운 팔만대장경을 수백 년 동안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이는 세계를 놀라게 했고, 세계유산 지정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어릴 때 성철 스님과 함께 놀았어요."

가야산국립공원사무소는 취재진에게 도시락을 마련해주었다. 찹쌀, 버섯, 한우, 사과 등 지역 농특산물을 재료로 한 친환경, 건강 도시락이었다.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되고, 쓰레기 발생을 막기 위해 국립공원 측과 도시락 업체들은 탐방객들이 도시락을 이용할 수 있도록 협력하고 있다.

탐방객들은 등산로 입구에서 도시락을 전달받고 등산 후 일정한 장소에 빈 용기를 반납할 수 있다. 겨울에는 보온 도시락도 제공된다. 한국에 넓게 퍼져 있는 등산 문화에 친환경 도시락 전달 체계가 접목되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성철스님 사리탑[사진/조보희 기자]

길을 안내한 박나영 가야산국립공원 자연환경해설사는 해인사가 있는 가야면이 고향이었다. 어릴 때 성철스님이 수행하며 거처하던 해인사 백련암에 친구들과 자주 놀러 갔다고 한다.

스님은 아이들을 무척 좋아해 아이들이 놀러 오면 사탕, 과자 등을 내주곤 했다. 스님이 "사탕 가져와라"하고 큰소리로 외치면 젊은 스님이 "네"하고 대답하며 달려 나와서 사탕을 가져왔다. 젊은 스님이 어딘가에 숨어있다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는 모습이 신기하고 재미있어 아이들이 "스님 한 번만 더"하고 조르면 성철스님은 다시 "사탕 가져와라"하고 소리쳤고, 아이들은 즐거워했다고 박 해설사는 전했다.

하루는 스님 무릎에 앉아 놀던 아이가 스님 귀를 손으로 잡아당기며 귀에다 '악!'하고 소리쳐 스님 고막이 터지기도 했다. 지금의 50, 60대들은 어릴 때 친구의 귀에 소리 지르는 장난을 예사로 했었다. 스님의 한량없는 인정이 굳은살처럼 무감각해진 도시인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박 해설사에게 성철스님의 법어인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에 관해 물었다. 그 깊은 뜻을 감히 안다고 할 수 없다고 전제한 그로부터 "현재의 완전성을 강조하신 말씀인 것 같다. 다른 곳, 다른 시간, 다른 상황에 있는 '나'가 아니라 지금, 여기 있는 '나'가 가장 완전에 가깝다는 뜻으로 새기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소리길을 걸은 뒤라서 그런가. 얼핏 수긍이 갔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2년 12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k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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