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너무 늦지 않게 그 시간이 오기를

한겨레 2022. 12. 2.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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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이도 글을 쓸 수 있을까?' 글방에서 만난 분홍의 글 제목이다.

첫 시간, 매주 읽을 책을 공지하자 분홍은 물었다.

다음 시간에는 노트북으로 글을 쓰자고 공지하자 분홍은 컴퓨터를 배우고 있으나 아직 서툴러 타자 치기가 어렵다고 했다.

돌아가며 글을 낭독하는 시간, 작은 공간에 분홍의 목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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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은의 소란한 문장들]홍승은의 소란한 문장들

책 읽기 좋아하는 할머니
존 윈치 글·그림, 조은수 옮김 l 파랑새어린이(2000)

‘분홍이도 글을 쓸 수 있을까?’ 글방에서 만난 분홍의 글 제목이다. 고운 원색 옷을 즐겨 입는 분홍은 삼십 대 두 자녀가 독립한 뒤 홀로 지낸다. 쉬는 시간이면 “너무 바쁘다” 하소연하는 분홍에게서는 자긍심이 느껴진다. 바빠도 시간을 쪼개 계속 배우고 싶어 하는 분홍에게서 흐르는 기운이다.

첫 시간, 매주 읽을 책을 공지하자 분홍은 물었다. “어떻게 책을 구하죠? 지난번에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때도 엄청 애먹었거든요. 막막해요.” 책방에서 책을 사거나 전자책이나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 게 모두에게 당연히 가능할 거로 믿었던 나는 잠깐 멈칫했다. 다음 시간에는 노트북으로 글을 쓰자고 공지하자 분홍은 컴퓨터를 배우고 있으나 아직 서툴러 타자 치기가 어렵다고 했다. 또 멈칫. 여러 연령대의 동료가 모이는 글방에서 온라인으로 글을 공유하는 방식을 당연하게 삼아왔는데, 브레이크가 걸렸다. 재빨리 공지를 수정했다. “다음 주에는 노트북이나 공책과 펜을 챙겨와 주세요.”

다음 시간, 사람들 앞에는 노트북과 노트가 놓였다. 30분 타이머를 시작하자 익숙한 타자 소리와 종이에 펜이 닿는 마찰음이 동시에 울렸다. 돌아가며 글을 낭독하는 시간, 작은 공간에 분홍의 목소리가 울렸다. “왜 나는 글을 못 쓸까. 책을 너무 읽지 않아서일까. 책을 읽지 못하고 지내온 것 같다. 난 왜 이리 시간에 쫓기면서 살고 있지. 일을 하면 몸이 지쳐버린다. 집에 가면 배는 고픈데 밥도 먹기가 힘들 때도 많다. 왜일까. 너무 많은 걸 하고 싶었던 건 아닌데.”

최근 나에게 글방 접근성을 고민하게 돕는 동료들이 늘었다. 대식구와 함께 사는 햇님은 자기만의 방이 없어 몰래 글을 쓰고, 한글 파일에 비밀번호를 건다. “혹시 가족들이 볼까 봐 잠가놨어요. 이곳이 유일한 제 방이에요.” 내 방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고, 가까운 이의 눈치 보지 않으며 마음껏 읽고 쓸 수 있는 내 자리를 낯설게 본다. ‘언어의 세계에서 소외된 이들의 문장 찾기’에 관심 있다고 했으면서, 소외를 너무 납작하게 여긴 거다.

책 한 권 읽을 여유 없이 숨 가쁘게 살아온 동료들이 쓰고 싶어 하는 간절함을 느낄 때면, 존 윈치의 그림책 <책 읽기 좋아하는 할머니>를 떠올린다. 할머니는 책 읽고 싶다는 바람 하나로 시골행 기차를 탄다. 시골에서는 고요하게 읽을 수 있을 거로 믿으며. 짐을 풀고 드디어 책을 읽으려고 하자, 길 잃은 어린 양이 나타난다. 양에게 분유를 먹이며 한 계절을 보내니 이번엔 가뭄이 와서 동물들을 돌보고, 홍수가 와서 동물들과 비를 피한다. 수확한 열매가 썩지 않도록 잼을 담근다. 돌보고 돌보느라 계절이 흐른다.

마침내 겨울이 왔다. 할머니는 안락한 의자에 앉아 수많은 동물과 책들 사이에서 잠들어 있다. 무릎에는 읽다가 엎어둔 책 한 권과 안경이 있다. “이제서야 할머니는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답니다.” 물끄러미 ‘이제서야’라는 글자를 본다. 자기만의 방, 욕망을 탐구하고 표현할 자유, 읽고 쓸 권리. 그것들을 품에 안고 여러 존재를 돌보며 살아온 얼굴들을 떠올린다. 그 얼굴들에 할머니의 평안한 표정이 겹친다. 나는 바란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자신을 돌보는 시간 한 줌 마련할 수 있길, 안락한 의자 하나쯤은 늦지 않게 가질 수 있기를.

홍승은/집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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