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슬픔의 힘에 눌리지 않으려 ‘러닝’ ‘슈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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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 '나이트 러닝'과 지난해 발표된 '우리가 소멸하는 법', 그 전년의 '슈슈' 등 상실과 결핍을 겪'는' 이들을 주인공 삼되 이야기의 물살이 상류와 하류처럼 퍽 다른데, 잃고 있게-잊게 되는 내력이 제각각인 현실 탓이겠다.
그럼에도 제 몸을 잘라서라도 잃어버린 가족을 보겠다며 매일매일 팔을 자르고, "슬픔의 힘에 눌리지 않"으려 매일 밤 달리는 이들('나이트 러닝')이 우화인 듯 현실인 듯 존재하고, 결별을 통한 영원한 기억('우리가 소멸하는 법')이, 잔 선택들의 잘지 않은 결실에 대한 낙관('모두에게 다른 중력')도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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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한 필치로 상실의 온도 감각시켜
나이트 러닝
이지 지음 l 한겨레출판 l 1만5000원
표제작 ‘나이트 러닝’과 지난해 발표된 ‘우리가 소멸하는 법’, 그 전년의 ‘슈슈’ 등 상실과 결핍을 겪‘는’ 이들을 주인공 삼되 이야기의 물살이 상류와 하류처럼 퍽 다른데, 잃고 있게-잊게 되는 내력이 제각각인 현실 탓이겠다. 필치로 상실의 온도를 맞추고 감각시키는 게 새삼 문학인 것이다. 소설가 이지. 2015년 두 신춘문예에서 상을 받으며 등단한 그의 첫 소설집 <나이트 러닝>.
경쾌한 슬픔의 경우랄까. “슬픔은, 슬픔이라는 이유로 쉽게 발설하지. 미움, 질투, 분노 이런 것들을 사람들은 주로 슬픔으로 위장해. 여기서는 그럴 필요가 없어서 좋아. 세수하고 싶으면 하고, 먹고 싶으면 꾸역꾸역 입에 넣고.” “너는, 모든 걸 슬픔으로, 네 고통과 슬픔으로 퉁칠 수 있어서 좋겠다.”(‘슈슈’)
유일한 혈육으로 10여년 만에 만난 이복언니가, 언니 덕분에 ‘오리’를 아이디로 사용해온 ‘나’에게 한 말이다. 집은 부유했으나 둘은 엄마가 달랐다. 동남아로 떠난 언니를 찾아 (새)어머니의 부고, 아니 소싯적 따뜻한 기억으로 이별, 퇴사 따위 나의 거의 모든 상실감을 나눠 기대고 싶었으나 언니는 담배를 문 채 욕을 할 줄 알았으며 먹고 마시는 데 경계가 없었고, 특히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어릴 적 ‘오르가슴’ 뜻을 묻자 -아마도 ‘나’를 위해- ‘오리 가슴’이라고 둘러대 주던 “예민한 사람”이지 않았던가. 그 언니가 이젠 ‘섹스’를 “세수”로 부르며 “남은 생을 방학이라 생각”하며 산다. 정작 지난 슬픔은 원천봉쇄되고, 대신 채팅앱으로 만난 남자 얘기, “남자는 싫어도 세수는 필요하”다는 세수론, 세수 타령하면서도 무심한 듯 드러내는 언니의 지금 사랑을 ‘나’는 듣고 본다. ‘슈슈’ 코를 코는 그 언니 옆에서 실로 오랜만에 꿈꾸지 않는 잠을 자는 것이다.
경쾌한데 서늘한 슬픔은 표제작 ‘나이트 러닝’에, 더뎌 뭉근한 슬픔은 ‘우리가 소멸하는 법’ 등에서 제 속도로 흐른다. 상실의 사유는 극적이지 않다. 우연적이고 자잘하거나 아싸리 드러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제 몸을 잘라서라도 잃어버린 가족을 보겠다며 매일매일 팔을 자르고, “슬픔의 힘에 눌리지 않”으려 매일 밤 달리는 이들(‘나이트 러닝’)이 우화인 듯 현실인 듯 존재하고, 결별을 통한 영원한 기억(‘우리가 소멸하는 법’)이, 잔 선택들의 잘지 않은 결실에 대한 낙관(‘모두에게 다른 중력’)도 가능해진다.
슬픔의 중력이 저마다 다르므로 슬픔의 속도가 같을 수 없다. 작가의 작품엔 유독 말하려다 그만두는, 하여 거둬지는 말이 많다. 독자에겐 닿았으나 작중 상대엔 닿지 않은. 그 말이 -절망이, 분노가, 고백이, 사랑이- 서서히 휘어져 전해지는 시간대에 있다는 신호와 같았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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