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사랑은 생존이기에, 이토록 다양할 수 있다네

한겨레 2022. 12. 2.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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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인류학자 애나 마친의 연구
생존 위한 네트워크 만들려는 욕망
‘버금 가족’에 대한 사랑인 우정부터
반려동물, 신에 대한 사랑까지…
<과학이 사랑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은 과학적으로 사랑이 어떤 것이다 정의하기보다, 사랑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살펴보는 데 집중한다. 게티이미지뱅크

과학이 사랑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모든 것
진화인류학자, 사랑의 스펙트럼을 탐구하다
애나 마친 지음, 제효영 옮김 l 어크로스 l 1만8800원

“사랑은 생존이다.”

<과학이 사랑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모든 것> 제1장 첫 문장이다. 그 뜻을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나의 경우 이게 무슨 소리야, 하는 궁금증이 완독의 동력이 됐다.

생존이란 잘 살아남아 차세대에 좋은 유전자를 물려주는 것. 그러자면 든든한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미성숙 상태로 태어나기에 그렇고 협력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기에 그렇다. 네트워크 동심원은 3배수로 늘어나 최대 150에 이른다는 ‘던바 법칙’에 따른다. ①부모, 파트너, 자녀, 절친 등 ‘중심 지지 세력’(5명) ②술, 영화, 외식 등 저녁시간을 함께 보내며 어울리는 ‘공감집단(15명)’ ③확장된 의미의 가족과 친척, 직장동료 등 ‘친밀한 집단’(50명) ④한 해 한 번쯤 만나는 ‘아는 사람’(150명). 군대와 흡사하다. 특수부대(5명), 분대(14명), 소대(45명), 중대(150명), 대대(300~800명). 양질의 네트워크를 유지하려면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야 하는데, 그게 일종의 사랑이라는 거다. 그때 분비되는 신경화학물질 베타엔도르핀이 면역체계를 강화해 건강한 유전자를 만든다. 지은이는 사랑을 생물학적 뇌물이라고 말한다.

솔직히 말해 ‘사랑 이야기’에 별 기대 안 했다. 감각적이고 본능적인 에로스, 정신적이고 인격적인 필리아, 성스러운 아가페 따위로 시작하면 던져버리려 했다. 책 중간쯤에 지역별 문화적 제약에 따라 사랑의 정의가 달라진다는 이야기 가운데 한 단락 등장하기는 한다. 지은이 애나 마친은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이자 진화인류학자. (‘던바 법칙’의 던바는 옥스퍼드대 동료교수 로빈 던바.)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 그리스 신화나 로마 신화? 없다.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 관심 없다. 영국인 자존심일까, 사랑을 ‘러브’ 단어 하나로 퉁친다. 미국 작가들이 모질게 우려먹는 짝짓기, 불륜 얘기? 그것도 사랑의 일종이기에 일부 나오기는 한다. 진심 진화인류학적 접근이기에 무심함이 대담함으로 비친다. 오로지 경험, 인터뷰, 실험과 학계의 연구 성과 종합이다. 그럼에도 높은 가독성은 촘촘한 구성과 맛깔스런 담론, 군살 없는 문장에서 온다.

‘사랑은 생존이다’는 ‘생존은 (갈증을 느낄 때 물을 갈구하는 것과 같은) 욕구다’라는 명제로 이어진다. 그럼으로써 ‘사랑은 생리적 욕구다’라는 논리가 완성된다. 사랑은 감정의 영역에 속한다는 통념을 뒤집는 논증을 바탕으로 지은이는 사랑의 스펙트럼을 넓혀간다. 던바의 동심원을 거멀못으로 까치집 짓듯이.

어차피 짝짓기부터. 수컷의 경제력, 암컷의 가임력을 교환하는 절차라는 게 진화론적 설명이다. 여성의 건강한 생식력 지표로 치는 허리둘레와 엉덩이둘레의 비율 0.7. 남성성의 이상적 지표로 치는 어깨둘레와 허리둘레의 비율 1.4. 양성 모두에 해당하는 몸과 얼굴의 대칭성 따위. 여성이 남성과 대등한 경제력을 갖게 되고 피임약이 널리 쓰이는 지금도 그 설명은 힘이 있다. 하지만 동성결혼을 허용하는 추세, 짝짓기와 후속 출산, 양육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아진 장수시대에 이를 스치듯 넘어가는 지은이의 태도, 마음에 든다.

진화인류학자인 애나 마친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 가까운 인간관계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며, 특히 부성애 연구에 있어 독보적인 선구자로 꼽힌다. 애나 마친 누리집 갈무리

이어지는 이야기가 중요한데, 짝짓기에 가려 간과한 친구 사이의 우정. 연애가 필수 아닌 선택이며 친구는 가족한테는 털어놓지 못하는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우리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버금가족’이기 때문이다. 한 인터뷰이는 “신이 가족을 대신해서 사과하는 의미로 내려주신 존재가 친구”라고 말했다.

일곱 가구 중 한 가구 꼴로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 우리. 밖에서 자식보다 반려동물 생각이 먼저 난다는 사람이 많은 요즘, 지은이는 그들과의 교감을 ‘다른 종과의 사랑’이라 이름 지었다. 3분간 개를 쓰다듬고 말을 걸고 난 다음 측정해 보니, 개와 주인한테서 옥시토신, 도파민이 유의미하게 분비되더란다. 베타엔도르핀과 함께. 정말로 개의 뇌를 동시에 스캔하여 이를 입증한 학자가 있다!

종교인의 신에 대한 사랑은 어떨까. 호기심 천국 캐나다 과학자 둘이 가톨릭 수녀 15명을 꾀어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 장치에 밀어 넣었다. 참가자들은 수녀로 살면서 겪은 가장 신비한 경험을 떠올렸다. 뇌 스캔 결과 그때 변연계와 피질 일부 영역에서 활성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인간 대 인간이 사랑할 때 활성화하는 영역이다. 신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동일하다는 결론. 신은 인간을 사랑할까. 책은 가타부타 않는데, 신을 자기공명영상 장치에 뉘고 싶은 이가 없지 않을 거다.

신앙처럼 일방적인 사랑에 유명인사, 아이돌 등 준사회적 사랑이 있다. 열성팬 중에 정신병리학적 문제가 있는 사람이 포함될 거라는 추측은 잘못이다. 조사 결과 ‘팬질’을 통해 사회적 삶의 부족함을 채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성인 팬 대다수가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며 가족관계도 원만하단다. 근데 왜? 지은이는 1950년대 등장한 텔레비전, 25만 년 전 등장한 호모사피엔스 사이의 시차현상이라고 본다. 인간의 뇌는 실제와 화면 속 인물의 차이를 인지할 만큼 진화하지 못했다. 그 결과 허상과 사랑에 빠진다는 것. ‘좋아요’를 누르고 팔로우하면 완벽남(여)을 득템할 수 있으니 얼마나 편한가.

모든 중독이 그렇듯이 사랑엔 어두운 면이 있어 착취, 강압, 학대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사이버 피싱, 가스라이팅이 그렇고 히틀러, 트럼프 같은 선동가도 여기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사랑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사라져도 우리한테 남는 것, 그리고 우리한테 필요한 소중한 것임은 변하지 않는다. 지은이는 자신의 책이 사랑의 광대함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왜 사랑하는가? 첫 문장처럼 끝 문장도 인상적이다. 사랑은 모든 것이다.

임종업 <뉴스토마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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