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니클라스 루만, ‘건조한 정신’의 승리

고명섭 2022. 12. 2.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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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계 이론 세운 사회학의 대가
학자‧언론인 10명과 한 대담 모음
하버마스 주체에 맞서 체계 제시
초인적 업적의 비밀 ‘메모 카드’

아르키메데스와 우리
니클라스 루만 대담집
니클라스 루만 지음, 김건우 옮김 l 읻다 l 1만8000원

‘이념 요새’(Ideenfestung). 독일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1927~1998)을 따라다니는 별명이다. 사회학 이론의 영역에서 난공불락의 성채를 구축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별명에 걸맞게 니클라스 루만은 위르겐 하버마스와 함께 20세기 후반 독일 사회학을 양분했다. 하버마스가 ‘의사소통 이론’으로 사회학의 지평을 넓혔다면, 루만은 ‘사회 체계 이론’으로 또 다른 지평을 열었다. 1987년 출간된 <아르키메데스와 우리>는 그 루만이 학자‧언론인 10명과 나눈 대담을 모은 책이다. 대담 대부분이 루만의 첫 번째 주저인 <사회적 체계들>(1984)이 나온 뒤 진행된 것이어서 루만 이론을 둘러싼 쟁점이 내용의 중심을 이룬다. 또 대담 가운데 일부는 학자 루만이 아닌 인간 루만에게 초점을 맞추는데, 루만의 자기 고백은 사회학 저서 뒤편에 머물러 있던 개인 루만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특히 한국어판은 상세한 역주를 덧붙여서 대담의 배경이 되는 루만 이론과 관련 지식을 동시에 음미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책에서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독일 언론인 발터 판 로숨과 한 대담이다. 이 대화에서 로숨은 ‘지식인’ 문제를 꺼내 집요할 정도로 루만의 생각을 캐물어 들어간다. 로숨이 생각하는 지식인은 “자신의 지식을 넘어 가치를 지향하며 이런 가치를 보편화하려는 사람”이다. 앞 시대 사르트르가 보여주었던 지식인, 곧 총체적 세계상을 품고 사회 변혁을 향해 자신을 던지는 지식인에 가까운 사람이 로숨의 지식인이다. 루만은 그런 지식인으로 자처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잘라 말하면서, 지식인의 정의를 바꾸어 자기 생각을 풀어놓는다. “나는 지식인을 서로 다른 것끼리 비교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루만은 이 비교의 대상이 서로 멀수록 그것이 일으키는 효과가 크다고 말한다. 루만의 이런 생각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가까이 연결하는 시적 작업’을 연상시키는데, 실제로 루만은 사물을 결합함으로써 ‘낯설게 하기 효과’를 일으키는 ‘시적 메타포’를 거론한다. 말하자면 루만은 지식인을 ‘지성을 사용하는 사람’으로 재정의하고 나서 그 지성의 핵심을 시적 상상력에서 찾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루만이 그런 시적 작업을 하는 사람으로 카를 마르크스를 거명한다는 사실이다. 마르크스는 헤겔 변증법의 ‘정신’을 ‘물질’로 바꾼 다음, 그 물질을 정치경제학과 결합해 정치적 변혁의 추구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시적 메타포의 지성’을 보여준 적실한 사례라고 할 만하다. 루만은 이 지식인 개념을 이야기하는 중에 칠레 생물학자 움베르토 마투라나를 거론하기도 한다. 마투라나는 ‘자기생산’(Autopoiesis)이라는 개념을 창안한 사람이다. 자기생산이란 자기를 스스로 생산하면서 자기를 유지해 나가는 생명체의 특성을 뜻한다. 루만은 마투라나의 개념을 가져와 자신의 ‘체계 이론’을 세우는 데 적용했다. 체계는 생명체처럼 스스로 자기를 생산하고 유지하다가 소멸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루만이 마투라나를 거론하는 데서 어떤 자부심을 읽어낼 수 있다. 생물학 개념을 사회학 개념으로 전용한 것이야말로 ‘시적 상상력’을 보여주는 분명한 사례 아니겠느냐는 자부심이다.

사회 체계 이론을 세운 독일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 위키미디어 코먼스

이 대담집은 당대 사회학의 맞수로서 루만과 하버마스가 대립하는 지점도 선명하게 보여준다. 두 사람의 논쟁은 196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하버마스는 이 대담들이 벌어질 무렵 펴낸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에서 루만 이론을 두고 ‘주체 철학의 유산을 체계 이론으로 모방한 것’이라고 차갑게 평가했다. 이런 평가에 맞서 루만은 하버마스가 이론적 철저성이 부족하다고 공박한다. 하버마스와 루만의 충돌은 두 사람의 이론 특성상 거의 필연적인 일이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은 주체에서 출발하는 것인 데 반해, 루만은 주체를 배제하고 ‘체계’에서 출발한다. 루만에게 주체란 기껏해야 체계 안에서 그 체계를 떠받치는 기능적 요소일 뿐이다. 루만은 다른 책 <사회 이론 입문>에서 하버마스가 주체를 강조하는 것을 두고 ‘부재하는 것의 이상화’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주체는 지금 여기에 있지도 않는데 그 주체의 이념을 붙들고 이상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학자로서 올바로 세계를 인식하려면 먼저 사회를 ‘주체 없는 체계’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루만의 생각이다.

루만의 체계 이론이 주체를 배제한다고 해서 개인의 의지나 욕망을 지워버리는 것은 아니다. 루만 자신부터가 행정 공무원으로 10여년을 살다가 뒤늦게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고 사회학 교수가 된 사람이다. 그런 이력에 관한 루만 자신의 증언을 이 대담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이 루만의 엄청난 이론적 생산성의 비밀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루만은 평생 70권의 저서와 450편의 논문을 썼다. 이런 초인적인 작업을 떠받친 것이 스물다섯 살 무렵부터 해온 ‘메모 카드’ 작성이었다. 책을 읽고 얻은 생각들을 그때그때 메모 카드에 써 넣어 상자에 모아두고, 필요할 때 이 메모들을 엮어 책으로 완성한 것이다. 메모 상자는 생각의 창고이자 이론의 공장이었다. 동시에 이 책은 루만이 근면의 화신이었음도 알려준다. 남들이 하루를 24시간으로 살았다면 자신은 하루를 30시간으로 살았다는 것인데, 그 말은 남들이 잠을 잘 시간에 자신은 책을 읽고 글을 썼다는 얘기다. “내가 모든 것을 하는 동안 사람들은 늘 자고 있는 셈이다.”

대담자가 루만에게 ‘삶의 모토’가 무엇인지 묻자 루만은 낮과 밤을 나눠 둘로 답한다. “좋은 정신은 건조하다”가 낮의 모토라면, “잘 숨어서 산 인생이 잘산 인생이다”가 밤의 모토다.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숨어서 건조한 정신으로 이론을 생산하는 작업에 모든 것을 바친 것이 자기의 삶이라는 얘기다. 루만은 빌레펠트대학에 임용될 때 연구 계획서에 ‘대상: 사회이론, 기간: 30년, 비용: 없음’이라고 간명하게 썼는데, 이 계획서대로 연구 작업을 계속해 30년 뒤 <사회의 사회>라는 최후의 주저를 내고 세상을 떠났다. 거의 컴퓨터와 같은 정확성으로 건조한 삶을 반복했기에 보통의 학자들은 따라올 수 없는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리라.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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