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 교체한 양대 악단, 거장들의 라이벌戰
치열한 선두 다툼은 월드컵이나 프로 야구에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한국 음악계의 대표적 라이벌 팀이 KBS교향악단과 서울시향. 정식 창단 시기(1956~1957년)와 두 악단의 지휘자를 모두 지낸 정명훈이라는 공통분모는 물론, 현재 예술의전당과 롯데콘서트홀에서 주로 연주한다는 점까지 같다.<그래픽>
양강 대결에서 전통적 우위를 보였던 오케스트라는 KBS교향악단. 1956년 창단 이후 국립교향악단(국향) 등으로 수차례 명칭과 소속이 바뀌면서도 임원식, 홍연택, 드미트리 키타옌코, 요엘 레비 등 국내외 지휘자들이 차례로 이끌면서 선두 자리를 지켜왔다. 정명훈 역시 짧지만 1998년 상임 지휘자를 맡았다. 국향과 KBS교향악단의 악장을 15년간 지낸 바이올리니스트인 김민 전 서울대 음대 학장은 “미국·일본 순회 연주에 의욕적으로 나서고 한 해 102회까지 연주회를 소화하는 등 정상이라는 자부심으로 넘쳤다”고 말했다.
2005년 서울시향이 재단으로 독립하고 정명훈을 예술감독으로 영입하면서 매서운 반격에 나섰다. 그 뒤 10년간 미국·유럽 등 굵직한 해외 투어, 김선욱·조성진 등 차세대 피아니스트 발굴, 과감한 현대음악 시리즈 도입, 명문 음반사 도이치그라모폰(DG)을 통한 음반 발매 등으로 한국 음악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었다. 서울시향의 연 예산이 KBS교향악단을 추월한 것도 이 즈음이다. 부천 필하모닉 제1 바이올린 부수석을 지낸 음악 칼럼니스트 최은규씨는 “정명훈 취임 이후 베토벤·브람스·말러 등 매년 새로운 시리즈를 통해서 달라진 기량을 선보이면서 서울시향이 아시아 수준급 악단으로 도약한 시기”라고 평했다.
하지만 2010년대 들어서 두 악단은 나란히 부침을 겪었다. 2015년에는 정명훈이 서울시향에서 물러났다. 2020~2021년에는 KBS교향악단 역시 후임자 물색 장기화로 인한 음악감독 부재(不在)가 계속됐다. 두 악단 모두 호재(好材)보다는 악재(惡材)가 많은 시기이기도 했다.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던 두 악단이 내년에 재격돌한다. 서울시향은 뉴욕 필하모닉의 음악 감독인 네덜란드 거장 야프 판 즈베던(61)이 지휘봉을 잡는 첫해다. 판 즈베던의 음악감독 정식 취임은 2024년. 하지만 한 해 앞당겨서 내년 7월부터 서울시향을 네 차례 지휘할 예정이다. 베토벤 교향곡 7·9번, 차이콥스키 4·5번,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등 악단의 ‘기초 체력’을 가늠할 수 있는 인기 곡을 고른 점이 눈에 띈다. 최은규씨는 “평소 연습을 철저하게 시키기로 유명한 판 즈베던이 서울시향과 어떤 앙상블을 빚어낼지 관심거리”라고 말했다.
올해 KBS교향악단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한 핀란드 지휘자 피에타리 잉키넨(42) 역시 내년 2년 차를 맞아서 말러 교향곡 5번과 베를리오즈 환상 교향곡, 월튼 교향곡 1번 등 다채로운 레퍼토리를 선보인다. 올해 초 KBS교향악단 계관 지휘자로 ‘소속 팀’을 옮긴 정명훈도 내년 9월 브루크너 교향곡 7번을 지휘할 예정이다. 계관 지휘자(laureate conductor)는 행정적 책임을 맡지는 않지만 꾸준하게 악단을 지휘하는 ‘명예직’으로 음악적 공로가 큰 거장들에게 수여한다.
최근 두 악단이 공개한 내년 연주 일정을 보면 해외 명바이올리니스트들을 협연자로 대거 초대한 점이 눈에 띈다. KBS 교향악단은 기돈 크레머(6월 24일)와 미도리(11월 25일),서울시향도 파트리샤 코파친스카야(3월 10~11일), 리사 바티아슈빌리(3월 24~25일) 등이 잇따라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최근 국제 콩쿠르를 통해서 두각을 나타낸 한국 차세대 연주자들도 협연자로 나선다. 서울시향은 피아니스트 박재홍(5월 11~12일)과 첼리스트 최하영(10월 20일), KBS교향악단은 첼리스트 한재민(9월 1일)과 협연한다.
2017년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자인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은 두 악단의 초대를 모두 받았다. 우선 내년 1월 28일에는 KBS교향악단, 이어서 6월 29~30일에는 서울시향과 협연할 계획이다. 최근 지휘자 겸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는 김선욱은 10월 26일 서울시향 공연에서 지휘와 피아노 연주를 모두 선보인다. 음악 칼럼니스트 황장원씨는 “최근 새 지휘자를 영입한 두 악단이 국내 팬들에게 친숙한 협연자와 연주곡들로 음악계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고 평했다. 음악의 라이벌전(戰)에는 패자가 없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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