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뚜껑에 관하여
아침 출근길의 클래식방송. 어쩌다 사소한 일로 남편과 불편한 관계에 놓였다는 어느 사연을 진행자가 상냥하게 소개한다. 이에 한 청취자가 득달같이 한 말씀을 보탠다. “어떤 집이든 뚜껑 열면 다 끓고 있어요. 비등점만 조금 다를 뿐이죠.” 이 정도의 멘트라면 세계문학전집을 두루 꿰뚫는 경지가 아닐까. 자주 막히는 짜증의 길에서 혈로 뚫듯 오늘은 뚜껑에 관해 생각해 본다. 굳게 닫힌 세상의 뚜껑을 열겠다는 듯 도로는 팽팽 돌아가는 바퀴들로 가득 찼다.
예전 술을 즐길 때 아침에 뜻밖의 뚜껑을 호주머니에서 발견하기도 하였다. 심심한 손이 지압용으로 챙겼던가 보다. 그때 소주병 뚜껑은 왕관처럼 생겼으나 이젠 손으로 돌려 딸 수 있다. 어느 날엔 자루 달린 두레박 같은 뚜껑을 작정하고 하나 챙겼다. 더러 붓글씨라도 쓸 때 연적 대신 쓰면 너무나 안성맞춤이었다.
멀리 인왕산이 보인다. 저 산의 꼭대기에는 해골 모양의 바위가 햇빛 모자를 뒤집어쓰고 있겠지. 북한, 인왕뿐만 아니라 웬만한 산의 정상은 큼지막한 바위다.
무거운 돌이 뚜껑처럼 덮고 있어 산을 산으로 만들어 준다. 그 뚜껑이 있기에 서울도 이만큼의 모양을 유지하고 건사해 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방대한 상품들의 진열장인 자본의 사회. 패션의 완성이 구두에 있듯 물건의 마무리는 뚜껑의 몫이다. 약국이나 시장을 보라. 알록달록한 제품들이 선반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건 뚜껑 덕분이다. 요술램프 속 유령처럼 뛰쳐나오겠다는 내용물의 소동을 안간힘을 다해 막고 있는 뚜껑들. 그러기에 이 세상의 안녕이란 뚜껑 속의 일인 것도 같아서 짐짓 불안하기도 하다.
이윽고 햇빛이 졸아들어 묵처럼 단단해진 어둠이 하루를 단호하게 닫는다. 이제 그 뚜껑 속으로 피난하듯 귀가하는 저녁. 식탁에 놓인 접시의 편평함은 가정의 평화를 뒷받침해 준다. 연속극이 시작되기 전 물 한 모금 하러 주방에 가면 엎드려 물기를 털어낸 그릇들의 고요가 손에 만져질 듯하다. 엉덩이까지 골고루 깨끗해진 접시는 정밀한 고독을 뚜껑처럼 뒤집어쓰고 제 몸을 말리는 중이다.
그 옆에 서면 무슨 소리가 들린다. 밤을 이용하여 ‘나’라는 뚜껑을 열어젖히려는 아우성인가?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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