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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온고‘지신’을 넘어 법고‘창신’이 필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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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우일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서울대 명예교수

이우일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서울대 명예교수

세종대왕 시대의 조선은 만만한 나라가 아니었다. 15세기 조선은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 중 하나였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정설이다. 당시 동아시아 지역의 혁신 48개 중 33개가 조선에서 비롯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주 산업인 농업의 생산성이 급격히 향상될 정도로 조선은 과학기술 혁신의 중심 국가였다. 하지만 세종 시대 과학기술 발전에 기반을 둔 국가의 기틀이 400여년에 걸쳐 무너져 내리며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해 버렸다. 과학기술을 잡학으로 치부해 도외시하고 교조화된 성리학 이념에 사로잡힌 결과, 혁신은 사라지고 국방과 민생이 무너졌다.

연산군 때의 일이다. 1504년 함경도 단천에 사는 2명의 기술자가 임금 앞에서 은 금속 제련의 획기적 방법을 시연했다. 지금도 쓰이는 ‘회취법(灰吹法)’이라는 기술인데, 이들이 ‘이 방법을 이용하면 납 1근으로 은 2돈을 만들 수 있나이다’고 임금께 고했다는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그런데 그 이후 조선이 이 기술로 무엇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반면 일본인이 조선 전문가들을 일본에 데려가 회취법을 활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일본에서는 새로 은광이 발견되며 조선에서 들여온 신기술을 활용하여 은의 수율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일본은 일약 세계 제일의 은 생산국으로 떠올랐고, 은으로 얻은 수입은 조총과 군선과 같은 군비 증강에 사용될 수 있었다. 군비 증강은 조선 침략으로 이어졌으니 바로 임진왜란이다.

내년 국가 R&D 100조 시대 개막
과학·기술 시스템의 대전환 시급
‘빠른 추격자’ 방식서 벗어나려면
민간 주도 혁신 생태계 구축해야

임진왜란 중에 조선 도공 수만 명이 일본으로 끌려갔다. 이 도공들은 일본 도자기 기술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켜 도자기는 18~19세기 가장 중요한 일본의 수출품이 되었다. 이렇게 쌓인 국부는 메이지유신(메이지 유신)과 그 이후 근대 일본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때까지도 조선은 새로운 지식과 문물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으니, 유연하게 첨단 기술을 받아들인 일본을 당할 수 없었다. 결국 일본이 조선을 침탈할 수 있는 원동력이 모두 조선에서 배운 기술이라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지난 60년간 우리 경제가 이룬 성장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잘 계획된 정부 주도의 전략과 그에 따라준 기업가들, 그리고 열심히 일한 국민이 합심한 결과다. 성장을 위해 정부는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 전략을 택했는데, 선진국의 기술을 들여와 제품을 생산해 국제 시장에 파는 것이다. 이 전략은 우리의 장점인 속도와 근면성에 힘입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눈부신 발전 이후 경제성장률의 지속적 하락에서 볼 수 있듯이 남을 모방하는 성공 모델은 이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과학기술 혁신에 기반을 둬 세상에 없는 제품과 기술을 선도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단계에 도달했다. 최근의 국제적인 기술패권 경쟁은 과학기술이 국가의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점을 다시금 깨닫게 하고 있다.

2023년은 우리나라 연구개발이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해다. 정부의 연구·개발(R&D) 투자가 최초로 30조원을 넘을 것이 확실하며, 민간을 포함한 국가 전체의 R&D 투자가 100조원을 넘게 된다. 국가 GDP 대비 R&D 투자는 세계 1~2위를 다투고, 투자액 자체를 따져도 OECD 국가 중 5위다. 외형적으로는 과학기술을 통한 혁신 기틀이 마련된 셈이다. 하지만 논문 양에 비해 영향력 있는 논문은 적고, 기술 무역수지 적자도 계속되는 등 투자 효율성에서는 아쉬운 점도 있다. 예전의 성공 공식에 얽매여 교조화된 ‘빠른 추격자’식 정책으로는 변화에 대처할 수 없다.

‘빠른 추격자’ 시절에는 모든 것이 정부 주도하에 계획됐고, 과학기술자들은 맡은 분야에서 주어진 역할을 다하면 그만이었다. 이러한 시스템은 연구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90년대 이후 달라지지 않았다. 성과 평가 시스템도 ‘빠른 추격자’ 패러다임에 맞춰져 있다. 하지만 창의적 아이디어는 미리 계획을 세운다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자연스럽게 나온다. 창의성의 가치를 인정하고 도전 정신을 북돋워 주는 생태계에서만 가능하다. 연구개발에 투입되는 막대한 투자가 제대로 위력을 발휘하려면 이제는 말뿐인 계획이 아닌 혁신적 생태계를 구축할 때다. 과학기술자들이 칸막이 안에서 각자의 전공에만 몰두해서는 혁신이 배태되기 어렵다. 담을 허물고 유기적 연결을 해야 하는 이유다. 연구자들도 안주하고 있는 틀을 벗어나는 과감성을 보여야 한다.

우리가 갈 길은 자명하다. 과학기술은 정치 논리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모든 정책은 과학기술에 근거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수립돼야 한다. 코로나를 거치며 우리가 직접 체득한 원칙이다. 또 과학기술 혁신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 시스템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기초-응용-개발의 선형적 구조에서 탈피해 언제든 혁신이 일어날 수 있는 구조로 바뀌어야 한다. 그리하여 더는 빠른 추격자가 아닌 ‘혁신 선도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혁신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변화에 적응 못 해 나라를 잃은 전철을 밟지 않는 길은 과학기술 혁신이 일어날 수 있는 국가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다.

이우일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