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가 정권 도구 됐다"... 월드컵 탈락 자축 시위대에 '총부리' 겨눈 이란

김표향 2022. 12. 1.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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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16강 좌절에 환호한 대표팀 선수 지인 사망
이란 축구팬 "대표팀 반정부 시위 연대 부족" 비판
귀국길 선수들 신변 우려… "정부, 선수 가족 협박"
이란 축구 국가대표팀 미드필더 사에드 에자톨라히가 지난달 29일 카타르 도하 알투마마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2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B조 최종 3차전에서 미국에 패배한 뒤 그라운드에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다. 도하=뉴시스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이란이 16강 진출에 실패하자, 이란 내 반정부 시위가 더 격화되고 있다. 시위 참가자들에게 축구 대표팀의 패배는 곧 이란 정권의 패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월드컵 탈락을 축하하며 투쟁 의지를 다졌고, 군경은 시위대를 또다시 무력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대표팀 선수의 지인이 보안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귀국길에 오르는 선수들의 신변 안전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16강 탈락 환호한 남성, 보안군 총격에 사망

이란 축구팬들이 지난달 21일 카타르 도하 칼리파 국제경기장에서 열린 2022 카타르 월드컵 B조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 "이란에 자유를" "여성, 생명, 자유"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이란 정부의 탄압을 알리고 있다. 도하=AP 연합뉴스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이란 수도 테헤란 북서쪽 도시 반다르에안잘리에 살고 있던 27세 이란 남성 메흐란 사막이 이란 보안군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그는 전날 열린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최종 3차전에서 이란 대표팀이 미국에 패했다는 소식에 자동차 경적을 울리는 시위를 벌인 것으로 전해졌다.

노르웨이에 본부를 둔 인권단체 이란휴먼라이츠(IHR)는 “머리를 직접 겨냥해 총을 쐈다”며 보안군을 비난했다. 이튿날 수도 테헤란에서 열린 장례식에서 추모객들도 “독재자에게 죽음을”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를 향해 분노를 터뜨렸다.

공교롭게도 메흐란 사막은 미국전에서 뛴 이란 대표팀 미드필더 사에드 에자톨라히의 지인이었다. 에자톨라히도 고인과 같은 지역 출신이다. 에자톨라히는 “어린 시절 팀 동료”라면서 두 사람이 유소년 축구팀에서 함께 활약했던 당시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그는 “네가 숨졌다는 소식에 가슴이 찢어지게 아프다. 언젠가 진실이 드러날 것”이라며 정부의 강경 진압에 대한 불만을 에둘러 표현하기도 했다.


정권 정당화에 이용된 축구… “대표팀 패배 염원”

이란 축구 대표팀이 지난달 29일 2022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미국에 패해 16강 진출에 실패했다는 소식에 이란인들이 거리로 나와 기뻐하며 춤을 추고 있다. 이란 언론인 마시 알리네자드 트위터 캡처

현재 이란 시민들이 축구 대표팀을 바라보는 시선은 싸늘하다. 축구가 이란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혹한 현실을 감추고 이란 정권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고 보고 있어서다.

이란 축구 대표팀도 시위대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긴 했다. 잉글랜드와 맞붙은 조별리그 1차전에서 국가를 부르지 않았고, 두 골이나 넣었지만 세리머니도 하지 않았다. 선수들의 목숨 건 행동에 국제사회의 찬사와 응원이 쏟아졌다.

하지만 이란 내 여론은 달랐다. 더 직접적으로 정부를 비판하지 않은 선수들에게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다. 한 이란 축구팬은 “선수들은 (이란 정부의 부당함을 알리는) 역사적 기회를 낭비했다”며 “축구 대표팀은 더는 이란 국민을 대표하지 않는다. 이란 정권이 대표팀을 정치화, 무기화했다”고 성토했다.

결국 이란인들은 대표팀이 월드컵에서 잘 싸우면 이란 정권이 정상이라는 잘못된 인식만 심어 줄 것으로 생각해 오히려 패배를 염원했다. 이란의 16강 진출이 무산되자 테헤란을 비롯해 이란 전역이 환호성으로 들썩거린 이유다.

주민들은 폭죽을 쏘고, 자동차 경적을 신명 나게 울려댔다. 거리에선 사람들이 팔짱을 끼고 덩실덩실 춤까지 췄다. 이란 반정부 언론인 마시 알리네자드는 이란 현지 영상을 트위터에 공개하면서 “이란은 축구에 매우 열정적인 나라인데 지금 이란인들은 거리에서 대표팀의 패배를 축하하고 있다. 그들은 이란 정부가 살인적인 정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스포츠를 이용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란 월드컵 국가대표팀 선수들이 지난달 21일 카타르 도하 칼리파 국제경기장에서 열린 2022 카타르 월드컵 B조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 국가가 나오는 동안 침묵하고 있다. 도하=AP 연합뉴스

시민들에게 외면받는 이란 축구 대표팀은 고립무원이다. 이란 정부가 대표팀에 대한 보복 등을 경고했기 때문이다. 이란 대표팀은 국가 제창을 거부한 후에도 정부 당국자로부터 “정치적 시위에 동참할 경우 이란에 남은 가족들을 체포, 고문할 것”이라며 협박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이란 대표팀은 웨일스와의 2차전, 미국과의 3차전에서는 국가를 불렀다. 미국전을 마친 뒤 미드필더 에자톨라히는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지 못해 죄송하다. 이란에 있는 팬들과 국민들이 우리를 용서해 주기를 바란다”며 고개를 숙였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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