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다시, 도하의 기적

‘적토마’ 고정운, ‘황새’ 황선홍, ‘왼발의 달인’ 하석주의 후반전 연속 골로 한국 축구가 북한에 3-0 대승을 거뒀다. 그런데 선수들은 비통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이겼어도 ‘탈락’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모두 고개를 떨구고 힘없이 그라운드 밖으로 걸어나오는 순간, 대반전이 일어났다. 선수들이 갑자기 얼싸안고 환호하며 기쁨의 눈물을 쏟았다. 관중석의 한국 응원단은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1994년 미국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마지막날 3경기가 동시에 열린 1993년 10월28일, 카타르 도하에서 벌어진 일이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일본에 뒤져 있던 한국은 두 나라 중 하나가 지거나 비겨야 미국행 티켓을 딸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기대대로 굴러가지 않는 법. 한국의 북한전 승리 순간, 사우디는 이란에 4-3으로 이겼고 일본도 이라크에 2-1로 앞선 채 종료 휘슬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때, 종료 10초 전, 이라크의 움란 자파르가 솟구쳐 전광석화 백헤딩 슛으로 동점골. 순식간에 일본 탈락, 한국 진출로 희비가 엇갈렸다. 한국에는 ‘도하의 기적’, 일본에는 ‘도하의 비극’으로 새겨진 사건이었다.

일본은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 29년 전 도하의 비극을 털어냈다. 지난달 23일 조별리그 1차전에서 강호 독일을 2-1로 꺾는 이변을 연출한 것이다. 모리야스 하지메 일본 감독은 도하의 비극 당시 선수로 이라크전을 뛰었다. 이번 월드컵에선 기적이란 말이 꽤 나오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아르헨티나를 이긴 게 처음이었고, 모로코가 유럽 강호 벨기에를 꺾은 것도 포함된다. 1일 폴란드가 아르헨티나에 0-2로 지고도 경쟁팀 경기 결과에 따라 막판에 극적으로 16강에 오른 것도 ‘도하의 기적’으로 불렸다.
한국은 지금 두 번째 ‘도하의 기적’이 필요하다. 3일 0시 포르투갈전을 꼭 이기고 우루과이-가나전이 한국에 유리하게 끝나야 16강에 오를 수 있다. 포르투갈과는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 20년 만의 재대결이다. 그때는 한국이 1-0으로 이겨 16강행을 확정했다. 월드컵 때마다 복잡한 경우의 수를 따지고 기적을 노리는 게 아쉽지만, 어차피 매 경기 후회 없이 온 힘을 쏟는 길밖에 없다. 기적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일을 확인하는 것이라 했다.
차준철 논설위원 cheo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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