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럼] 개교 30주년 한예종, 예술이 가야할 길은
전국 여러 곳에서 지역의 명예를 건 음악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이름난 음악제에만 유명 아티스트들이 몰리는 현상이 있었으나, 이제는 거의 모든 음악제에서 국내외에서 활동하는 유명 음악가들을 볼 수 있게 되었지요. 과거의 그릇된 학연과 지연에서 벗어나 음악인들이 클래식 음악의 부흥을 위해 애쓰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습니다.
하지만 호사다마랄까요, 조금만 잘 되면 말이 많아집니다. 국가 예산 없이 힘들게 운영하는 음악제에는 누구도 간섭하거나 시비 거는 것을 볼 수 없지만, 정부 단체의 예산이 편성되어 나름 안정되게 진행되는 음악제에는 시시비비가 끊이질 않습니다. 마치 요즘의 정치 행태와 같이 서로 흑백논리만 주장하는 것 같아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다들 잘 되자고, 또 잘 해보자고 하는 일인데, 양측이 조금씩 양보하고 이해하며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청중의 지속적인 사랑을 받는 음악제로 키워나갈 수 있을 텐데 말이죠.
말이 나온 김에 오늘의 한국 클래식 음악을 비롯한 국악·무용·미술 등의 예술 분야를 반석 위에 올려 놓은 고(故) 이강숙 한국예술종합학교 전(前)총장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객석'을 인수하고 2년이 지난 2015년 여름에 이강숙 총장이 전화를 걸어 '객석' 기자들을 점심에 초대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방배동 자택 근처의 설렁탕집으로 저와 다섯 명의 기자가 갔지요. 그분은 먼저 오셔서 자리를 잡고 계셨는데, 테이블 위에 엄청난 양의 소주와 맥주가 있어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설마 저 술들을 우리가 다 마시는 건 아니겠지"라면서요.
총장님은 간단한 격려 말씀을 끝내자마자 "소맥 한 잔씩들 해야지"라면서 약간 떨리는 손으로 소주를 맥주잔에 부으시는데, (아시다시피 보통 사람들은 소주 반 잔에서 한 잔 정도를 먼저 붓고 나머지를 맥주로 채우는 2대 8의 비율을 선호하는데) 소주를 맥주잔에 80%나 채우고 그 위를 맥주로 살짝 코팅하시는 게 아닙니까. 내심 "저 잔은 아마 본인께서 드시는 거겠지"라는 생각이 들기 무섭게 총장님은 나머지 여섯 잔마저 기자들 몫으로 계속 만드시더군요.
식당에 오기 전 총장님의 술 이력을 귀동냥으로 들었지만 "이젠 연세가 있으시니까…" 라고 방심한 게 큰 패착이었습니다. 저와 기자들은 서로 놀란 눈을 마주치면서 어쩔 줄 모르는데, 총장님께서 "자 한 잔씩들 하이소!"라며 부드러우면서도 카리스마가 녹아 있는 목소리로 권유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제가 먼저 씩씩하게 뒤따라 마셨고, 얼떨결에 다섯 명의 기자들도 원샷으로 마셨습니다.
그렇게 독한 술을 연거푸 두 잔씩이나 더 마셨으니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기자들의 얼굴은 이미 빨갛게 달아올랐지요.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큰일 났네요. 들어가서 기사 써야 하는데…"라는 기자들의 비명 섞인 하소연이 무색하게도 총장님은 그날 저희를 자택까지 데리고 가서 또 소주를 마시게 했답니다. 재밌는 기억은 8대 2 비율의 소맥을 석 잔이나 연거푸 마실 때까지 아무런 안주거리나 음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은 총장님이 과거 한예종을 설립할 당시, 주로 쓰시던 수법(?)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교사가 채 세워지기도 전, 교수를 임용할 때나 예산 확보를 위해 문화부 관리들과 식사할 때 그런 막가파 술자리를 많이 가졌다고 합니다. 술을 잘 못하던 유학파 교수 몇 명은 그런 술자리 후 응급실로 실려간 적도 있다지요.
어느 날 견디다 못한 문화부 직원들이 "먼저 안주나 시키고 술을 주시든지요"라고 말하면 "예산이 없어서요"라고 계면쩍은 듯 얼버무리니 다들 박장대소하고 며칠 내로 요청한 예산을 처리해 준 적도 있다고 합니다. 지금이야 안 통할 수도 있는 작전이지만, 학교를 위해 건강불문, 두주불사하는 그분의 열정에만큼은 다들 두 손 들었다고 합니다. 냉담한 예산 주무관 설득을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그를 찾아가 깍듯이 인사를 하면서도 달랑 음료수만 건넸다는 일화는 한예종 역사에 전설처럼 남았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한국예술종합학교가 금년에 개교 30주년을 맞았습니다. 사실 저는 '객석'을 운영하기 전에는 이 학교의 존재와 탁월함을 잘 몰랐습니다. 부끄럽지만 일반 종합대학교 내의 음악대학이나 미술대학이 예술가를 키우는 곳이라 생각했지요. 가끔 일부 예술전문대가 실용예술 중심의 예술가 등을 배출한다고 들은 적은 있었습니다.
그런 제가 '객석'을 운영하면서 알게 된 것은 한예종이 우리나라 예술발전에 끼친 이루 말할 수 없는 업적입니다. 오늘날 세계가 인정하는 숱한 예술가들을 배출한 한예종이 비단 이강숙 총장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가 예술계의 미래를 먼저 예측하여 발전시킨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예종에 오래 몸담았던 김대진 총장이 취임 후 설치법 개정에 매진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쉽게 말해 한예종도 이제 다른 대학처럼 석사와 박사 학위를 수여할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는 얘기입니다.
그동안 정부는 한예종이 교육부 산하가 아니라는 이유로, 또 일반대학들은 한예종만 혜택을 받는다는 이유로 이 요청에 반대를 해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 예술가들의 심도 높은 기량 함양과 세계 유수의 예술대학과 발맞추기 위해서라도 법의 개정은 필요해 보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서로에 대한 이해와 조금씩의 양보 아니겠습니까? 국회도 진영논리를 떠나 여야가 힘을 합쳐 도와주길 바랍니다. 사실 의원들께서도 이미 알고 있지 않나요? 예술이야말로 시대와 세대를 넘어 정치, 이념, 종교까지 아우른다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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