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가 공주를 돋보이게 한 '난쟁이' [김선지의 뜻밖의 미술사]

2022. 12. 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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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론소 산체스 코엘료, '인판타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와 막달레나 루이즈', 1585~1588년, 캔버스에 유채, 207×129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스페인 국왕인 펠리페 2세의 딸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의 초상화다. 펠리페 2세는 16세기 유럽의 패권을 장악한 합스부르크가의 수장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5세의 장남이다. 그는 무적함대 아르마다로 오스만 제국과의 레판토 해전에서 대승한 후 최전성기를 맞이한 스페인 황금시대의 군주이기도 하다.

이런 대단한 군왕을 아버지로 둔, 합스부르크가의 공주 이사벨의 자태는 우아하면서도 사뭇 장엄하다. 표정에는 자부심과 강한 의지가 엿보인다. 16세기 중반, 스페인 왕실은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가져온 금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공주의 공식 초상화는 당시 스페인 왕조의 힘과 권위를 보여준다. 깃털 머리장식을 한 이사벨은 섬세한 레이스 장식의 하이칼라가 달린, 금실로 수놓고 온갖 보석들로 장식된 화려한 실크 드레스를 입고 있다.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호화로운 목걸이와 오른손에 들고 있는 아버지 펠리페 2세의 초상화가 새겨진 단단한 돌 카메오(cameo)는 그녀가 고귀한 왕가의 혈통임을 과시한다.

작은 몸집의 여인이 공주 옆에 나란히 있는데, 그녀의 키는 이사벨의 허리께에도 미치지 못한다. 공주는 위풍당당한 눈빛으로 관람자를 응시하며 왼손을 여인의 머리에 얹어 놓고 있다. 막달레나 루이즈라는 이름의 이 노파는 왜소증 장애인을 낮잡아 부르는 이른바 '난쟁이(dwarf)'다. 검은 드레스에 붉은 산호 목걸이를 한 그녀는 식민지에서 들여온 두 마리의 작은 원숭이를 안고 있다. 손으로 '난쟁이' 여인의 머리를 누르고 있는 공주의 자세는 그녀를 지배하는 왕족의 권력을 상징한다. 늙고 왜소한 시녀는 젊고 키가 크며 활기찬 공주와 대비되며 주인의 우월성을 부각한다. 그녀는 원숭이들과 마찬가지로 공주의 또 다른 애완동물이다.

16, 17세기 스페인의 궁정은 기형적 외모를 가진 사람, 광인, 수염 난 여성, 여왕 옷을 입힌 원숭이 등 많은 종류의 기이한 인간과 동물을 소유했다. 특히, 왜소증 장애인을 각지에서 수집하여 궁정에 두는 것은 중세 이후 모든 유럽 왕실의 전통이었으며, 거의 18세기 말까지 계속되었다. 이들은 예술품, 희귀한 고대 서적, 갖가지 진귀한 물품들과 함께 왕실의 컬렉션이었다. 왕족과 귀족계층은 이들을 국가 간 외교적 목적을 위한 선물로 주고받았고, 세습할 수 있는 사유 재산으로 여겼다. 그들은 왕실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광대 역할을 했다. 또, 공식적인 행사에서 왕이나 왕비 바로 옆에 서도록 했는데, 그들의 작은 키가 왕족들을 훨씬 더 커 보이게 했기 때문이다. 종종 초상화에서도 아름다운 의복으로 치장하고 왕실 후원자 바로 옆에 서서 왕족의 우월함을 보여주기 위한 소품이 돼야 했다.

왜소증 광대에 대한 태도는 이중적이었다. 사람들은 비정상적으로 작은 그들의 몸을 혐오하면서도 초인적인 영적 능력을 가진 신비로운 생명체, 자연의 경이로움으로 여겼다. 생물학적 기형으로 보기보다는 일종의 마법적 존재로 보았던 것이다. 이들 모두가 학대를 받거나 노예 취급을 당한 것도 아니었다. 적잖은 궁정 '난쟁이'들이 왕실의 후원으로 부와 명성을 누렸다. 권력자와 그들의 사이에는 친밀감과 우정도 있었다. 그러나 인간 대 인간의 대등한 관계에서 오는 친밀함이라기보다는 한쪽이 일방적으로 시혜를 베푸는 관계에서 오는 우정이었다. 이 작은 사람들은 왕족을 즐겁게 해 주고 그들의 자녀들과 함께 놀아 주는 일종의 인간 애완동물 같은 존재였다.

'난쟁이'와 함께 그려진 왕실 초상화는 스페인 궁정에서 시작되었고, 이것이 나중에 유럽 왕족 초상화의 한 장르가 되었다. 한편, 근친혼으로 인한 심각한 유전적 결함이 '합스부르크 턱'으로 발현되었고, 이것이 스페인 왕실을 대대로 괴롭혔다. 펠리페 2세는 심한 주걱턱으로 인해 윗니와 아랫니가 교합이 맞지 않아 음식을 씹지 못해 갈아먹어야 했고 발음도 매우 부정확했다고 한다. 그의 딸 이사벨의 초상화를 보면 주걱턱이 심해 보이지 않지만, 화가가 이상화해 그렸을 가능성이 있으니 모를 일이다. 펠리페 2세의 증손자 카를로스 2세에 이르면 다물어지지 않는 입에서 늘 침이 줄줄 흐를 정도로 턱 기형이 심각했고, 각종 질병과 성 기능 장애가 있었으며, 결국은 자손을 낳지 못해 대가 끊겼다.

합스부르크가 사람들은 이 저주받은 턱을 숨기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거의 모든 초상화에서는 목 부분이 풍성하게 부풀려진 옷깃이 등장하며, 특히 여성들의 경우 턱 대신 머리에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머리를 최대한 부풀리고 보석을 넣은 화려한 머리 장식을 하고 있다. '난쟁이'가 등장한 왕실 초상화 역시 합스부르크가의 유전적 결점을 경감하는 데 이용되었을 것이다. '난쟁이'가 동반하는 초상화에는 분명 왕족의 아름다움과 소인들의 추함을 병치해 상대적인 우월함을 증명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개념이 없던 때, 종적인 수직 관계의 사회질서가 지배하던 왕조시대에는 이런 초상화가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러나 현대의 인권 의식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막달레나 루이즈와 함께한 공주의 초상화가 확실히 불편하다. 누군가의 장애를 자신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한 도구로 소비하는 행위를 보면서, 그림 속 왕족의 허세가 얼마나 속보이고 역겨운 것인지 집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김선지 작가·'그림 속 천문학'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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